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포커스
[신진 여성작가 3인] <아오이 가든>의 편혜영
최하나 사진 이혜정 2007-06-15

당신들의 썩은 내가 내 코를 찌르고 있어

다리는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퍼렇고 꺼멓게 썩어 있었다. 대퇴골이 다 드러난 살 끝이 풀어진 실밥처럼 너덜거렸다. 너덜거리는 살과 달리 뼈는 조형물처럼 단단해 보였다. 까맣게 썩어 있는 살 사이에서 대퇴골이 형광등처럼 빛났다. _<시체들> 중에서

시체들이 출현한다. 쥐에 뜯긴 채 썩어버린 아이, 박제된 채 벽에 걸린 소녀, 짓뭉개지고 찢긴 살덩어리. 시취(屍臭)가 폐부 속까지 배어든 이곳에선 살아 있는 인간도 기실 시체와 다를 바 없다. 폐가에 방치되어 산 채로 썩어가는 아이들(<저수지>), 전염병이 창궐한 도시에 고립된 채 불신의 독을 내뿜는 주민들(<아오이 가든>), 철창 안에서 굶주린 개와 싸움을 벌이는 소년(<만국박람회>). 편혜영의 소설집 <아오이 가든>은 출구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악몽의 극한을 펼쳐놓는다. 출발점도 종착점도 보이지 않는 이 지옥도에 그나마 끝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죽음이다. 자글대는 구더기떼 위에 몸을 누이거나, 아니면 아예 개구리가 되어 추락하거나. “현대인의 대부분이 굉장히 무기력한 상태로 살아가지 않나.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시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력한 자아가 극한까지 나아간 상태가 시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반복적으로 쓰게 된 것 같다.”

읽는 순간 눈을 돌리고 싶어지는, 편혜영 소설의 ‘불쾌함’은 시체의 등장, 그 자체보다는 코앞에 그것을 들이미는 듯한 집요하고 치밀한 묘사에 기인한다.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몸을 해부하듯 샅샅이 기술하는 문체는 묘사를 통해 시각적인 쾌감을 선사하는 대신, 추하고 역겨운 대상을 직시할 것을 반복적으로 종용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자의 살갗에 지독한 공포를 불어넣는 것은 ‘냄새’다. 생선 비린내부터 썩은 살에 흐르는 고름 냄새까지, <아오이 가든>은 무취의 활자를 연결해 콧속을 파고드는 질척한 악취를 풍긴다. “사실 냄새라는 것은 소설에서 가장 묘사하기 힘든 부분이다. 냄새를 표현할 수 있는 형용사도 지극히 한정되어 있는데, 그런 것들을 던지면 오히려 독자들이 스스로 환기하는 이미지가 큰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읽고 자신이 경험했던 것 중에 제일 더러운 냄새를 떠올렸다고 하더라. 문자이기 때문에 느끼는 충격이 더욱 컸던 것이 아닐까.”

홍콩에 사스(SARS)가 창궐하던 당시 장례식장에서조차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아오이 가든>이, 몽골에는 맨홀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다는 신문기사에서 <맨홀>이, 미제로 종결된 여대생 실종사건에서 <저수지>가 탄생했다. 현실의 사건들로부터 촉발된 편혜영의 소설들은 시공간의 구체성을 지운 채 지극히 상징적인 배경을 무대로 진행되지만, 역으로 그렇기에 보편화된 지도를 그려낸다. 발전과 진보라는 허울 아래 드리워진 그늘. 편혜영의 그로테스크함과 엽기는 결국 자본주의 문명의 미끈함 아래 은폐된 균열과 부패를 적시한다. “<좋은 생각>류의 감동을 주는, 따뜻한 이야기들을 원래 좋아하지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음습하고 어두운 부분에 경도되는 편이고, 그러다보니 문명 반대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 것 같다. 사실 문명 비판, 이라는 주제를 의식하고 쓴 것은 아니다. (웃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무역회사의 사무직으로 일하던 편혜영은 “무언가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늦깎이로 문예창작과에 진학했다. 펜 끝에는 피와 고름이 낭자하지만, 인간 편혜영은 쉽게 상상할 법한 이미지와는 상반되게 밝고 여성적이다. “평소에 혼자 있으면 뭐하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쥐 배 가르고 놀아요, 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하기도 하고. (웃음) 글과 나의 이미지가 많이 다르니까 사람들이 더 재미있어하는 것 같다. 현실에서 나는 정말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회인이다. (웃음)” 2001년 입사해 지금까지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 편혜영은 출퇴근에 속박된 직장인으로서의 일상과 작가로서의 삶을 병행하고 있다. “청탁이 잘 안 들어와서 어려운 점은 별로 없다”고 장난스레 이야기하는 그에게 가장 힘겨운 것은 “본인의 한계가 보일 때”다. 아예 다음에 무엇을 써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을 때, “내가 정말 글 쓰는 사람 맞나” 슬럼프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될 때면 “모든 것을 다 잊을 만큼의 희열”을 느낀다는 그는 올 여름 두 번째 소설집을 출간할 예정이다. “할 일이 서로 미워하는 일밖에 없는, 폭력적이고 극악한 사람들”을 그릴 장편도 머릿속에서 슬슬 싹을 틔우고 있다. “주제의식의 무게에 짓눌리는 것을 경계한다”는 편혜영이 궁극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즐겁게 쓸 수 있는 소설이다. “앞으로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다른 일을 하면서 소설을 계속 쓸 것 같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지루한 소설은 아니다. 다른 사람은 재미없어도, 쓰는 나는 재밌으니까 됐어, 라고 위안할 수 있는(웃음)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