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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활주로는 넓게 비어 있더라

소재의 새로움이 휘발된 자리에 상투적인 줄거리만 남은 MBC <에어시티>

주말 밤마다 활주로를 달리는 MBC ‘에어시티’호는 현재 높이 날진 못하고 있다.

이정재와 최지우라는 선남선녀가 왕림하고, 제작비도 제법 들여(60억여원) 스케일도 ‘빵빵하다’는 이 드라마는 입국 수속을 밟기 전만 해도 눈이 휘둥그레질 신세계로 안내해줄 것 같은 설렘을 안겼지만, 여행의 절정은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라는 말처럼 이륙하자마자 픽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중반을 넘어선 현재 소수의 집중적인 열광과 다수의 관성적인 지지 어느 쪽에도 선명하게 자리를 매기지 못한 상태다.

이 드라마에 따르면 인천국제공항이라는 ‘에어시티’는 짐작보다 더 거대하고 살벌한 곳이다. 만남과 헤어짐, 일탈과 ‘다시 제자리로’가 교차하는, 인간사의 소소한 감성이 물결치는 ‘비행기역’이 아니라 국제 범죄조직이 드나드는, 그래서 나라의 안전을 위해 역사적 사명을 띤 공항과 국정원 요원들이 24시간 경계 태세를 늦출 수 없는 제2의 국경인 것이다. 그러나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서도 사랑은 꽃피는 법이어서 최지우와 이정재를 중심으로 사랑의 트라이앵글이 그려져 있다.

드라마는 사소한 개인사부터 거창한 국가의 안위까지 종횡무진하는 에피소드의 나열에 각종 장르를 비벼 액션의 박진감, 수사 과정의 긴장감, 멜로의 애틋함 등을 두루두루 조준하고 있다. 이정재를 위시해 슈트와 제복의 근사한 맵시를 자랑하는 남성 출연진의 비주얼과 각 잡힌 몸짓은 넷상에서 ‘훈남시티’라는 애칭을 얻을 만큼 시각적인 양식도 제공한다. 이제껏 공항은 해외로 떠나는 연인을 간발의 차로 붙잡은 뒤 ‘누구야’를 부르며 포옹과 키스로 극적인 ‘해피 엔딩’을 장식하는 데 단골 무대였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의 공항 내부에까지 진입한 ‘에어시티’는 적어도 그 같은 상투성에서는 벗어나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는 <히트> <겨울연가> <모래시계> <제5공화국> 등 기성 작품들의 잔영이 찰기없이 서걱거리고 있다. 중차대한 사건에 사적인 사연이 개입해 감정 과잉이 되는 캐릭터들은 얼마 전 막을 내린 <히트>의 누군가를 닮았고, 고압적인 검찰이나 총을 든 채 출동하는 공권력의 모습은 정의의 사도가 나섰다는 안도감보다 왠지 모를 공포감을 안기며 <제5공화국>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정재가 여성의 등 뒤에서 말없이 애틋한 무표정을 지으면 <모래시계>의 재희와 오랜만에 재회한 것 같은 착각이 들고, 최지우가 간혹 유창하게 외국어를 구사할 때에는 청승과 청순의 ‘청’자가 사라졌는가 싶다가도 촉촉한 감정을 표출하려 들면 <겨울연가> 등 그때 그 시절에서 멀리 도망쳐온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이는 출연진과 제작진의 이력서를 잘난 체하고 들춘 데서 비롯한 억지의 기시감일 수도 있다. 하나, <에어시티>에는 줄기와 잔가지의 구분과 균형을 상실한 복잡한 재료들이 클리셰와 새로움 사이에서 헤매고 있다. “아직도 예뻐 보이고 가슴도 떨리는” 전 부인(문정희)에 대한 감정과 공적으로 자꾸만 엮이는 최지우를 향한 관심을 가슴에 품은 이정재의 멜로 라인에 발라드 넘버의 음악이 애절하게 깔렸다가 어느새 널뛰듯 악의 무리를 추적하고 활주로의 안전상태를 점검해야 하는 화급한 에피소드로 이동할 때에는 좀 어질어질하다. <에어시티>를 방문한 소감은 장르의 탄탄한 매력도, 신선한 캐릭터의 흡인력도 만끽하지 못한 채 드넓은 공항을 다리가 퉁퉁 붓도록 누빈 듯한 허탈감으로 이어진다.

공항이라는 배경이 일상성에 바탕을 둔 근거리의 일과 사랑 이야기에 집중하면 허전할 만큼 어마한 공간일까. 불치병, 불륜, 출생의 비밀 등이 없는 ‘야심찬 시도’를 만나는 것은 반갑다. 그러나 인간의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 어느 쪽도 낚아채지 못하는 듯한 <에어시티>는 아직은 높이 날아 멀리 보는 새는 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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