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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단편 14] 김주리 감독의 <자야 한다>
강병진 사진 이혜정 2007-06-20

밤이 됐으니 자고, 서른이 됐으니 결혼?

뇌는 침대에 눕는 순간 살아 움직인다. 낮에는 몰랐던 시계의 초침 소리, 냉장고의 기계음들이 들리기 시작하고 온갖 잡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회상과 상상과 공상을 일삼는다. 뇌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자야 한다, 자야 한다, 자야 한다. 단편 <자야 한다>는 어느 날 이 주문을 외우게 된 한 여자의 번민이 뒤섞인 하룻밤을 묘사하는 영화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온 여자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그러나 심란한 마음을 다잡으려는 그녀에게 잠은 더한 고통이다. 남편과 싸우는 옆집 아줌마의 목소리는 옛 남자와 결혼한 신부의 조롱처럼 들리고, 윙윙거리며 울리는 냉장고 소리는 난데없이 화가지망생의 비루한 일상을 되새겨놓는다.

<자야 한다>가 묘사하는 잠은 자신의 시계과 다른 이의 시계를 맞추는 시간이다. 20대 후반의 주인공이 잠자리에서 겪는 고통은 곧 다른 이의 시간보다 늦게 흐르는 자신의 시간에 대한 비관이다. 그녀에게는 자기 또래가 가진 애인이 없고 변변한 직업이 없다. 영화를 연출한 김주리 감독은 “누구나 자신의 나이로 요구받는 사회적 역할이 있지만, 그걸 맞추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내 또래 사람들을 봐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자야 한다>는 사회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을 찾는 하룻밤을 다룬 영화다.” 서른을 앞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더 큰 공감은 불면증을 겪는 주인공이 눈을 감았을 때 펼쳐지는 영상의 세계다. 김주리 감독은 <자야 한다>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안톤 체호프의 단편인 <자고 싶다>를 참조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일하는 어린 유모가 꾸벅꾸벅 졸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의 두려움을 떠올리는 이야기다. 품에 안고 있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회상으로 이어지는 등 현실과 판타지를 잇는 묘사가 매우 영상적이었다.”

영화를 선택한 대다수 사람들이 겪는 과정이지만 김주리 감독 또한 사회의 표준 시계와 다른 시계를 선택해야 했다. 현재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 영화과 4학년인 그는 영상원에 들어오기 전, 바로 옆에 있는 한국외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연출은 연극부 활동을 하던 고등학생 때부터 하고 싶었지만 “일단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내적으로 좀더 커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에 들어간 학교였다. 불문과 학생들 속에서 혼자 영화과 학생처럼 살아야 하는 어색함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그 시간이 후회스러운 건 아니다. “영화를 즐기는 것과 업으로 삼는 건 어떻게 다른 건지, 무엇보다 자신이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지를 고민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아직도 성장영화들이 좋은 걸 보면 지금도 사춘기인 것 같지만. (웃음)” <어바웃 슈미트> <사이드웨이> 등을 연출한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또한 그가 나이든 사람들의 성장통을 다루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현재 준비하는 졸업작품은 자신의 내적인 세계를 파고들기보다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 계획이다. 서른여덟살의 이혼녀가 전남편을 두고 우즈베키스탄에서 날아온 나타샤란 여자와 연적 관계에 놓인다는 이야기로 여자에게 결혼의 의미와 외부인을 바라보는 편견을 짚어볼 생각이다. 하지만 그전에 김주리 감독은 먼저 영화제를 통해 관객과 만날 계획을 갖고 있다. 이미 올해 서울여성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자야 한다>가 오는 7월에 열리는 부천국제영화제에도 출품되었기 때문. 불면증으로 고통받는 관객은 올해 부천을 찾아 동병상련의 기쁨을 맞이해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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