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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야반도주라도 하지그랬소
정이현(소설가) 2007-06-29

상황마다 최악의 선택만 하는 황진이와 놈이의 답답한 러브 스토리 <황진이>

<황진이>를 보면서 가장 먼저 느낀 점. ‘송혜교는 예쁘구나.’ 그 다음에 느낀 점. ‘송혜교는 정말 예쁘구나. 근데 이거 혹시 <황진이>가 아니라 <임꺽정>이야?’ 시작 약 30여분 뒤, 어쩌면 이 영화에는 내가 아는 ‘그 황진이’가 안 나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뭐냐, 일부러 홍석중 소설 복습까지 하고 왔건만.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하는 수 없다. 영화 시작 약 1시간30분 뒤, ‘그 황진이’는 이미 포기하고, 황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생과 놈이라는 이름을 가진 의적 두목의 사랑 얘기를 감상 중이다. 그런데 자꾸만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얘들아. 너희 둘이 되게 사랑하는 거 알겠거든. 그러니까 제발 속마음 좀 툭 터놔봐. 보는 사람 갑갑해 죽기 전에.’

영화가 막바지로 치닫는다. 금강산에서 직접 찍어왔다는 풍광이 펼쳐진다. 긴 치맛자락을 끌고 외로이 바위를 기어오르는 진이의 모습에 (영화 시작하고 처음으로) 안심이 되려는 찰나, 그 높은 곳까지 기를 쓰고 들고 온 보퉁이에 눈이 멎는다. 갑자기 불안해진다. 서, 설마? 아니나 다를까, 진이는 꽁꽁 싸들고 온 보자기를 풀어헤치고는 놈이의 뼛가루를 하늘 높이 흩뿌린다. 마무리로,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읊는 것도 잊지 않는다. 영화는 그렇게 끝까지, 가련한 운명을 타고난 두 청춘 남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애절하게 환기한다.

이 영화를 두고 유명한 기생이자 뛰어난 여성 예술가인 황진이의 삶을 제대로 그렸네, 못 그렸네 논쟁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영화는 애초부터 황진이라는 실존인물의 생애를 재현하거나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배경이 조선시대일 뿐, 이것은 다만 내성적 성격의 두 소년 소녀가 겪는 ‘지독한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효수를 당하고서도 끝나지 않는 그들의 사랑은 사실 초반에 꽤 쉽게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진이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바로 그때, 문제의 첫날밤을 치르던 날 말이다. 진이는 놈이를 불러 묻는다. “나를 좋아해요?”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알면서 왜 물으시나?) 하지만 그녀는, 나를 좋아한다면 내 미래에 대해 함께 상의해보자고는 말하지 않는다. 유관순 열사 버금가는 비장한 표정으로 객관식 문제를 낼 뿐이다. 4지선다도 아니고 3지선다다. 놈이는 괴로워 어쩔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왜 네 앞길이 달랑 세 가지뿐이겠느냐고, 좀더 넓게 생각해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여자가 침묵한 이유는 몰락한 제 처지에 대한 예민한 자존심과 허세 때문일 것이고, 남자가 침묵한 이유는 여자의 몰락이 자신 탓이라는 알량한 죄책감과 윤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차라리 그날 밤 이상한 선문답을 나누고 비감어린 초야를 치를 시간에, 그냥 둘이 손잡고 도망쳤더라면 그들의 미래는 훨씬 편안하지 않았을까? 진이가 기생이 된 데는 세상을 발밑에 두고 비웃기 위해서라는 표면적 알리바이가 있지만 실은 오갈 데가 없어서일 것 같다(만일 자발적으로 기생이 되었다면, 기생 생활 내내 수심에 가득 찬, 폐위당한 공주님 같은 표정은 뭐냔 말이다!). 놈이는 출생이 천하다지만 그만하면 경제적 수완도 있어 보이고 뭘 해서라도 제 여자 고생시킬 남자는 아니지 않은가. 누군가 먼저, “사랑한다, 그러니 날 믿고 우리 같이 가보자”라는 그 한마디만 했더라면 그들의 운명이 그렇게 얼기설기 꼬이지 않았으리라 본다.

편한 길 외면하고 구곡간장 애태우며 험한 산길 굽이굽이 돌아가는 남녀. 위기 상황 앞에서 합리적 해결책을 찾진 못할망정 시위하듯 가장 나쁜 선택을 하는 남녀.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 역할을 번갈아 하면서 그놈의 사랑 한번 참으로 복잡하게 확인하는 남녀. 내가 지금 이 영화에 ‘그 황진이’가 안 나왔다고 이러는 거 아니다(아 글쎄 포기했다니까! ㅠ0ㅠ). 그렇지만 주인공이 누구든, 그들의 사랑에 최소한의 공감은 하게 해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지금은 21세기, 휴대폰 위치추적까지 되는 세상에서 커뮤니케이션 부재로 파국을 맞이하는 러브 스토리에 감정이입하기란 실로 생뚱맞다. 이쯤에서 그녀의 명대사(!)를 패러디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사랑한다는 말을 이토록 어렵게 하는 연인들이 어디 있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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