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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리 아이작 정
김도훈 2007-06-29

올해 칸영화제에서 만난 가장 멋진 인간은 <문유랑가보>(Munyurangabo)라는 영화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된 한국계 미국 감독 리 아이작 정이었다. 겨우 3만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문유랑가보>는 소름끼치는 대학살의 상처를 안은 르완다의 심장으로 향하는 일종의 로드무비다. 가끔은 화면을 탐닉하는 데 약간의 인내가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느릿느릿 주인공 소년들의 여정을 뒤따르다보면 인간과 대륙의 시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 이르는데, 그 경험이 거의 몽환적으로 아름답기까지 하다.

조촐히 카페에서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이 남자가 정말이지 좋은 감독이 되겠구나 싶었다. 게다가 그는 거대한 영화제의 주요 부문에 초청된 대개의 신인감독들이 뿜어대는 괴상한 예술적 자의식도 없었다. 겸손하고 선한 열정이 조근조근 입에서 전해지는 덕에 좋아서 혼쭐이 났다. “한국어를 못해서 미안하다”고 죄스러워하는 이 남자를 덥석 껴안고 싶은 마음으로 인터뷰를 끝냈고, 그와 동시에 칸영화제도 끝났다. 습도 높고 사람 많은 서울에서 두번의 지랄 같은 마감을 끝내다보니 새로운 만남이 주던 흥분마저 추적거리는 일상으로 사라지려는 순간, 한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리 아이작 정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 벌어질 아주 실낱같은 가능성 때문에 메일을 씁니다. 지금 인터넷 경매사이트 이베이에다 카메라를 한대 팔려고 올려놓았는데요,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구매자의 아이디가 ‘kimdohoon’이더군요. 만약 이게 진짜로 김 기자님이라면 저는 경매를 중단하고 무료로 카메라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아니라면, 하하하. 죄송해요. 이런 말도 안 되는 메일. 하여튼 만나뵙게 되어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세상의 모든 인연은 우연으로 시작된다고 믿지만, 도대체 이런 기이한 우연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마음에 드는 카메라를 이베이에서 발견해 원하는 가격을 올려놓았는데, 카메라를 올려놓은 주인이 바로 리 아이작 정이었던 거다. 초현실적인 신의 농간에 소름이 다 끼친다는 호들갑과 함께 “하지만 저예산으로 차기작을 준비할 감독님에게서 고가의 카메라를 무료로 받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카메라를 판 가격이 다음 영화에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라는 요지의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몇 시간 만에 다시 답장이 왔다.

“정말 기막힌 우연이군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저는 9월에 촬영할 다음 영화의 제작비를 이미 마련한 상태입니다. 이번에는 35mm로 찍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기자님이 차기작의 재정을 걱정해주신 건 정말로 감사드리지만 카메라만큼은 꼭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굉장한 우연을 기념하는 의미에서요.”

사람은 섬이고, 그 섬들은 모두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하신 백수 윌 프리먼의 말이다. 솔직히 위대하신 프리먼님의 마지막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적은 없었다. 사람이 모두 섬인 건 맞는데 아주 가까운 몇몇 섬들만 아슬아슬하게 썩은 나무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영화는 꿈이고 인생은 현실 아니더냐. 영화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생에 무슨 신비로운 법칙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 한데 예순살의 칸영화제는 너 따위 염세주의자야말로 틀려먹은 인간이니 좀 닥치고 살라며 뒤통수를 후려쳤다. 옳다. 프리먼님의 말이 맞고 말고. 사람은 모두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게다가 그 사슬은 이역만리의 섬마저도 마술처럼 연결해준다. 가끔 인생은 영화보다 더 마술 같다는 고루한 말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을 만큼 인생은 마술 같다. 어디 한번 잘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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