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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이름

제 이름을 스스로 지어 몸소 제 출생신고를 하는 갓난아이는 없다. 그러니 호적에 오르는 이름에는 평생 그 이름으로 불릴 사람의 뜻이 조금도 반영되지 않는다. 제 이름을 탐탁스러워 하지 않는 사람이 적잖은 것도 당연하다. (조)부모든 직업적 작명가든 이름을 짓는 이가 너무 무디거나 너무 뾰족하거나 너무 진보적이거나 너무 보수적일 때, 그 이름은 ‘튀기’ 십상이다. 그리고 이름이 너무 튀어 이름 주인의 스트레스가 너무 커지게 되면, 당사자는 제 이름을 바꾸기 위해 법원 문을 두드린다. 이태 전 문화방송이 내보낸 미니시리즈 <내 이름은 김삼순>도 그런 삽화를 품고 있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만도 ‘삼순’보다 더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이름이 얼마든지 있다.

‘종석’이라는 내 이름도, 우스꽝스러울 건 없지만, 너무 밋밋하다. 내가 지을 수 있었다면 좀 더 경쾌하고 우아한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항렬자인 석(錫)의 금속성부터가 마음에 차지 않는 데다가, 그 앞의 종(宗)은 뜻만 거창할 뿐 소리가 투미하다. 망상에 가까운 기대를 자식에게 걸었던 20대 청년의 마음자리가 안쓰럽다. 그런데 나도 그 이름의 작명자를 탓할 처지가 아니다. 그이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내 두 아이에게 고유어 이름을 주었는데, 겉멋이든 뭐든 그 즈음엔 ‘모던’해 보였던 이 이름들이 이젠 어쩐지 너무 잘아 보인다. 아이들도 제 이름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옛 사람이라면 제 이름의 뜨거움을 아호로라도 식힐 수 있었겠지만, 이제 아호는 구닥다리들의 허세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도 현대인들에겐 아호를 대체할 만한 수단이 있다. 전자우편 아이디도 그 가운데 하나다. 슈퍼시니어 세대를 제외하면 전자우편 주소 하나 없는 이는 드문 세상이니, 사람들 대부분이 호적이름말고 이메일 아이디라는 현대적 아호를 하나 이상 지닌 셈이다. 제 호적이름의 로마자 머리글자를 이메일 아이디로 삼는 ‘덤덤파’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제 취향에 맞춰 아이디를 새로 짓는다. 나도 전자우편 주소를 셋 지녔다. 그래서 현대적 아호가 셋이나 된다. 만든 순서대로 보이자면 aromachi, misshongkong, lunedemiel이다.

aromachi는 다니던 신문사의 메일 아이디인데, 내 두 아이의 이름을 이어붙인 뒤 마지막 자음을 잘라낸 것이다. 처음 듣는 이들이 재미있어 하는 misshongkong은 네이버메일의 아이디다. miss는 내 ‘여성성’을 뽐내려 부러 고른 것이지만, hongkong은 내 뜻대로 된 게 아니다. miss 뒤에 붙일 이름으로, korea와 seoul에서 시작해 내게 익숙한 나라와 도시들을 스무 개가 넘게 시도해 봤으나, 죄다 기존 네이버 회원들이 쓰고 있는 것들이어서 내 차지가 되지 못했다. misshongkong에 이르러서야 그 아이디를 써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으로 정해지고 나니 홍콩이라는 도시가 부쩍 정겹다. 다음메일에서 아이디로 쓰는 lunedemiel은 밀월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lune de miel’을 잇댄 것이다. 처음엔 honeymoon을 골랐으나, 이 이름 역시 기존 회원 누군가가 쓰고 있어서 lunedemiel로 낙착됐다. 다음메일에선 아이디말고 닉네임을 따로 짓게 돼 있어 ‘여름씨’를 골랐다. 아내의 닉네임이 ‘봄씨’여서 그걸 본뜬 것이다.

인터넷에 글을 올릴 때 실명 대신 쓰는 필명, 곧 닉네임도 현대판 아호랄 수 있겠다. 나는 전자우편말고는 인터넷에서 글을 쓰는 일이 없지만, 지난해에 한 사이트에 가입해 내가 종이매체에 기고했던 글을 거기 옮겨 두고 있다. 글을 간수할 데가 마땅치 않아 일종의 스크랩북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도 ‘여름씨’라는 닉네임을 쓴다. <프레시안>과 <오마이뉴스> 같은 인터넷 신문말고 내가 들어가 보는 국내 사이트는 거기밖에 없는데, 그 곳에 글을 올리는 네티즌들의 닉네임을 보고 있으면 그 이름의 주인들에 대한 상상이 발동해 설핏 웃음이 나온다. 물론 선의의 웃음이다.

인터넷이 아직도 서먹서먹한 나야 닉네임이 ‘여름씨’ 하나밖에 없지만, 여느 네티즌이라면 닉네임을 여럿 지니고 있을 것이다. 전통적 의미의 필명은 직업적 문필가의 특권 같은 것이었다. 활짝 핀 이 넷월드에선 이제 누구나 필명을 얼마든지 지닐 수 있다. 본명의 억압을 눅일 여지가 늘어난 것이다. 그 현대적 필명 역시, 전통적 필명처럼, 필자(의 본명이라는 껍데기)를 지우면서 필자(의 취향이나 상상력이나 무의식 같은 알맹이)를 드러낸다. 한편, 이름이라는 껍데기가 인격의 일관성을 거드는 그릇이나 거푸집 노릇을 할 수도 있다면, 한 이름의 독재에서 해방되는 것이 인격의 분열이나 해리를 다그칠 수도 있을 게다.

전통적으로, 직업적 문필가나 연예인들보다 더 많은 이름을 지녔던 이들은 신분 노출이 육체적 위험으로 이어지게 마련인 지하운동가들이나 게릴라 전사들이었다. 이메일 아이디와 닉네임을 아우르면 나도 호적이름말고 이름을 넷이나 더 지닌 셈이다. 그 이름들을 헤아리다 보면, 문득 내가 비밀결사의 세포에라도 속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