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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신인감독 10인의 출사표 - 이미연
2001-02-17

<버스 정류장> - 나를 키운 건 8할이 파리

▒감독이 되기까지1990년 5월 파리의 공기는 불온했다, 이미연(38) 감독과 그 일행한테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몇년째 활동하던 연극판에 회의가 들기 시작하던 때였고, 어찌어찌하다 칸영화제에 갔던 때였다. 돌아오는 길에 파리에 들렀다. 한 1주일쯤 머물렀나. 공기 때문이었다, 파리의. 프랑스어 통역차 함께 갔던 친구는 그해 가을, 한국에서의 잘 나가던 직장을 접고 훌쩍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이미연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파리로 가겠다.’ 몇달 동안 프랑스어를 공부해서 떠듬떠듬 입을 뗄 수 있을 정도로 익혔고, ESEC(실기 위주로 진행되는 프랑스 사립 영화학교)에 등록하고 친구를 통해 살 집도 구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날 밤 부모님께 “저 내일 프랑스로 떠나요” 했다. 꽤 나이가 드셨던 부모님은 기절할 듯 놀라셨지만 이미 저지른 일. 파리에 도착한 날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하녀방’이라고 부르곤 했던 월세 15만원 정도 하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10층 다락방에서 살았고, 영화 월간지 통신원, CF코디, 통역, 식당 아르바이트 등 온갖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었다. 그리고 방학 때면 스페인에서 이탈리아, 체코까지 이 나라 저 나라 떠돌아다녔다. 보헤미안처럼, 홀로. 95년 서울로 돌아와서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 연출부에 합류했다. 사실 영화계 경력은 그때부터다. 그리고는 15년 지기인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 <반칙왕>에서 프로듀서를 했다. 어쩌다가 영화감독이 되었을까? “살다보니. 원래 목표를 세우고 필승, 운운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어찌어찌 흘러가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파리에서 돌아오면서 했던 딱 한 가지, “이제부터 영화는 나의 ‘일’(job)이다. 프로페셔널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다. 무엇보다도 “감독은 최선봉에 선 사람이다. 더이상은 못하겠어, 하고 물러설 수 없다. 나 홀로 정면승부를 해야 하는 위치다.” 이제 첫 승부, <버스 정류장>은 지금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중이라 많은 부분 미지수지만 멜로의 궤도를 이탈한 드라마로 나갈 것이라고.

▒어떤 영화를 만들것인가

파리에서 본 영화 가운데 가장 충격을 받았던 건 파졸리니의 <마태복음>과 에르마노 올미라는 이탈리아 감독의 <우든 크로그>였다. 흔들리는 핸드헬드로 찍어낸 선동가 예수, 그리고 농부의 가족과 함께 사계를 살면서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찍어낸 네오리얼리즘계 영화. 아, 이런 영화가 벌써 ‘있었다’. 이미연 감독이 이 영화를 본 건 90년대지만 이미 60, 70년대에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영화들을 벌써 만들어버렸다는 것이 절망스럽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젠 할 수 있는 영화와 좋아하는 영화는 다르다는 것을 아는 연륜이 생겼다. 체질적으로 몸집이 큰 영화는 안 좋아하고,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 흔히 하는 말로 발이 땅에 붙어 있는 영화, 쉽고 간단하고 기교없는, 카메라와 필름만으로 정면승부하는 영화를 하고 싶다고 한다. 이전에 <조용한 가족> <반칙왕> 프로듀서를 하다보니 돈이나 산업 측면에서 영화를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원초적인’ 영화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무뎌졌었는데, 얼마 전에 TV에서 <무셰트>를 다시 보면서 반성 많이 했단다. <버스 정류장>은 아직 채 시나리오도 확정되지 않았지만, 일단 말을 많이 하는 영화라고. 에릭 로메르 영화처럼 말을 통해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나 사건이 흘러간다는 것.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멜로의 관습적 플롯이나 장르의 법칙에 충실하지 않아 하겠다고 했고, 서울 변두리 일상의 공간으로서의 버스 정류장, 판타지의 공간이 아닌 살아숨쉬는 일상의 공간을 그리고 싶다고 한다. “영화는 생긴 대로 나온다는 사람들의 말에 내가 어떻게 생겼나, 요즘은 매일 거울본다”고.

▒<버스 정류장>은 어떤 영화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의 남자. 나이에 비해 조숙한 생각을 하는 젊은 여자를 만난다. 그리고 드라마가 시작된다. 둘의 공통점은 상처가 있다는 점. 영화는 두 사람의 상처와 그들의 일상을 그린다. 그러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갖고 있는 상처를 ‘알아본다’는 것. <여자는 배 남자는 항구>라는 노래제목에 빗대 이야기하자면 누군가는 버스 정류장이고 그의 상대방은 버스가 되는 것이다. 여자가 버스고 남자가 버스 정류장이 될 수도 있고, 남자가 버스, 여자가 버스 정류장이 될 수도 있다. 버스 정류장은 두 사람의 일상과 만남의 공간이기도 하고,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위정훈 기자oscar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