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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직업의 판타지
정이현(소설가) 2007-07-13

<러브 & 트러블>의 게이 친구와 동거하는, 마감없는 나라의 여기자 얘기는 어떤 판타지일까

꿈(보다 여드름이 더) 많았던 소녀 시절, 잡지사 기자가 되고 싶었다. <하이틴> <여학생> <주니어> 등의, 여중고생들을 타깃으로 삼은 월간지들이 동네 서점가를 풍미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홀로 상상에 빠지곤 했다. <여학생>의 근사한 소파에 앉아 근사한 연예인과 인터뷰하는 근사한 내 모습을. 망상을 한없이 발전시키다 보면 판단력을 잃게 된다. 나는 마침내 한시가 아까워서 못 견디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잡지사에는 학생 리포터가 필요할지도 몰라. 정 안 되면 사무보조라는 것도 있잖아? 기자가 되는 데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는 수학이나 생물 따위를 공부하는 대신 바로 실무를 배워야겠다는 열망에 불타오른 나머지, 직접 부딪쳐보기로 했다.

나름대로 각본도 짰다. ‘김혜수와 이상아를 합친 것처럼 예쁜 친구가 있다. 성격이 무척 소극적인 이 아이를 데리고(지가 무슨 매니저라고?) 귀사를 방문하여 표지 모델 카메라 테스트를 받겠다. 담당기자님과 약속을 잡고 싶다(차마 스스로 초절정 미소녀를 사칭할 정도로 양심 불량은 아니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듯, 일단 잡지사에 놀러가 기자와 안면을 트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거다.

잡지 뒤쪽에 실린 번호로 전화를 거니 웬 여자가 받았다. 나의 로망, 기자 언니가 틀림없었다. 용기는 다 어디로 갔는지 나는 더듬더듬 용건을 말했다. 수화기 너머의 여자는 인내심있게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일단 사진을 보내세요. 사진을 본 다음에 저희가 연락드립니다.” 심드렁하고도 사무적인 말투였다. 옅은 짜증과 차가운 깍듯함이 한데 배어 있는 그 목소리에 나는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분명 애독자라고 밝혔는데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단 말인가. 그런 전화들이 하루에도 여러 통씩 걸려오리라는 것을,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업무 중 받는 민원전화에 그런 목소리로 대응한다는 것을, 기자도 결국 직장인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끝내 이루지 못한 꿈 때문인지 아직도 기자가 나오는 영화라면 솔깃해지는 경향이 있다. <러브 & 트러블>의 여주인공 잭스는 <보그>의 패션담당 에디터다. 요즘 여학생들이 선망하는 직업으로 수위를 다툴 것이다. 그녀의 삶은 과연 멋지다.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의 예쁜 옷을 입고 앙증맞은 자동차에서 내려 런던 보그사로 살랑살랑 걸어 들어가는 모습은 많은 여성들이 입 헤 벌리고 부러워할 만하다. 게다가 깔끔한 아파트에서 말 잘 통하는 게이 친구와 함께 오순도순 살고 있다. 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걸 두려워하는 성격이 된 것도 이해할 만하다. 모든 게 이렇게 완벽한데 괜히 이상한 사랑에 빠졌다가 삶의 균형이 흐트러지면 얼마나 짜증나겠어?

그리고 자연스레 현실 속의 내 기자 친구들이 떠올랐다. 지긋지긋한 마감 타령을 늘 입에 달고 살며, 마감이 닥치면 며칠째 감지 않은 머리는 기본이요,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얼굴을 뿔테안경으로 감추고 다니는 진짜 ‘생활인 기자들’. 소설가이신 스승께서는 일찍이 ‘소설가는 참 좋은 직업이다. 소설만 안 쓰면’이라는 명언을 남기셨다. 잭스를 보고 있으면, 기자 또한 최고의 직업임이 새삼 가슴에 와닿는다. 물론, 그놈의 마감만 없다면 말이다.

게이 친구와의 동거생활 묘사도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다. 런던 물가가 살인적인데 기자 월급으로 월세를 어떻게 감당하지? 먼지 한올 없는 집은 누가 치우지?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래도 타인인 룸메이트 앞에서 왜 이유없이 옷을 훌렁 벗고 활보하는 거지?

꿈과 현실의 간격이 크다는 사실은 언젠가는 누구나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낙차의 폭이 너무 클 때, 꿈 너머의 실생활에 대한 거짓 믿음과 진지한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 살다보면 판타지가 필요한 순간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현실을 성찰하게 하거나 현실을 각성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좋은 판타지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게이 친구와 동거하는, 마감없는 나라의 여기자 얘기는 어떤 판타지에 속할까. 나를 소박한 리얼리스트라 비웃어도 할 수 없다. 기자를 꿈꾸는 소녀에겐 이런 영화 감상보다 ‘직업의 적나라한 실체’라는 특강이 훨씬 더 유용할 테니. 강사로는 <씨네21> 기자들을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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