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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내 곁에 있어줘> -김선재
2007-07-13

고통이 절망을 끌어안았을 때

오늘 아침도 가벼운 탄식으로 시작한다. 어제 읽고 자려고 마음먹었던 홈스 컬렉션은 한장도 더 넘기지 못한 채 잠들고 만데다 깜박 잊고 널지 못한 빨래들은 세탁기 안에서 구깃구깃 구겨진 채 반쯤 말라 있고, 날씨에 예민한 알레르기 덩어리인 내 몸은 비를 예보하고 있다. 이제 와서 홈스를 읽겠다고 나서는 것도 한심하고 빨래 하나 기억 못하는 주제에 무슨 추리소설을 읽나 자괴감에도 빠진다. 내 일상이라는 것들이 알레르기처럼 근질근질하고 구겨진 빨래처럼 어수선하게 내 머리를 헝클어놓고 지나간다.

이 영화를 볼 즈음도 역시 별반 다르진 않았다. 둘째아이를 낳고 어떻게든 육아와 창작을 동시에 해내고 싶은 욕심에 꾸역꾸역 써서 낸 시나리오는 퇴짜맞았고 퇴짜맞을 이유가 명명백백한데도 뻔뻔스럽게 시나리오를 낸 아줌마다운 기개도 부끄러웠다. 한번 해보는 거지 뭐, 하는 식의 밀어붙이기가 시나리오 한편에 일년 혹은 몇년씩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어디 가당키나 한가. 밥을 하다가도 문득, 아이들을 죽어라 혼내다가도 문득, 걸어다니다가도 문득 그때 요행수를 바란 것이 두고두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무렵 만난 에릭 쿠 감독의 영화는 부끄러워 비틀거리던 내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가한 셈이다.

사실 좋아하는 영화를 목록으로 만들라고 하면 자신있지만 그 영화들이 왜 좋은지 말하라고 하면 말문이 막히고 만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누군가가 그 사람이 왜 좋아요? 라고 물어보면 그냥 배시시 웃고 마는 것처럼 좋은 영화를 보면 그냥 입을 꼭 다물고 감상에 젖어버리고 만다. 머릿속에 감동적이었던 장면을 넣어두고 바라보게 된다. 마치 좋아하는 풍경 속에 앉아 있는 것처럼. 영화 한편이 내가 가볼 수 없는 곳의 풍경 하나를 안겨주고 간다면 머릿속에서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진다 해도 그거면 족하지 않은가. 도마 위에 놓고 마늘 다지듯 다져버리면 그 감동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렇지만 상대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그때부터 말이 많아지듯 뭔가 맘에 안 드는 영화를 만나면 저런 시나리오도 영화화한다느니, 캐릭터가 하나도 살아 있지 않다느니, 미스 캐스팅이라느니… 주제넘게 주워들은 현학적인 단어들로 영화를 평한다.

지금까지는 정작 영화 이야기는 이리저리 피해서 할당받은 지면의 절반 이상을 내 일상의 이야기로 채워버리게 된 비굴하지만 어쩔 수 없는 나만의 사정이었다. <내 곁에 있어줘>를 처음 봤을 땐 내내 담담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갈 무렵 ‘사랑하는 이여, 내 곁에 있어줘요. 내 미소가 사라지지 않게’라고 하얀 종이 위에 한자 한자 타이핑되어갈 때는 나도 모르게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눈물과 콧물이 수습되기도 전에 극장 안은 밝아졌고 어두운 장면에서 몰래 눈물 한번 훔치고, 시끄러운 장면에서 몰래 콧물 한번 훌쩍이며 나름대로 영화관 에티켓(?)을 지켜온 나로선 너무 난감했다. 그리고 그 뒤 다시 몇번 더 보게 되었을 때는 영화 시작부터 올라오는 슬픔을 참기가 어려웠다. 아니, 그건 사실 슬픔이라고 꼬집어 말하긴 좀, 아니 많이 미흡하다. 바람에 떠다니는 공기를 한줌 움켜쥐어도 풀잎들과 꽃의 향기, 비에 젖은 땅의 비릿함을 손에 쥐지 못하는 것처럼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이다. 그렇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린 더 오감을 열어두고 자연과 삶의 신호를 기다리지 않는가. 입을 다물고 말이다.

이 영화 안에는 위로의 신호들이 가득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노인의 슬픔 앞에 기다리는 것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삶을 살아온 테레사 첸의 따스한 포옹과 위로다. 사랑하는 소녀에게 버림받은 또 다른 소녀는 투신을 하지만 그녀를 맞이하는 건 죽음이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푹신하고 안전한 가슴이다. 삶이란 처참하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삶은 내 곁에 있어줄 누군가만 있으면 영원히 행복할 거라고도 말해준다. 그녀에게 전해줄 편지를 완성하고 전해줄 결심을 하는 것만으로도 죽는 순간 미소 지을 수 있는 가여운 그러나 행복한 경비원처럼. 나는 에릭 쿠 감독의 그런 착한 절망이 좋다. 그리고 소박한 희망을 남겨주고 영화를 맺는 방식도 좋다. 그는 또 다른 영화 <12층>에서도 자살한 남자가 천사처럼- 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천사의 지위를 부여받을 수 없는 잡귀일지라도- 매일매일 자살충동을 느끼는 뚱보 여인 곁을 지키며 위로의 시선을 보내게 한다. ‘악!’ 소리의 고통이 ‘꺅’ 소리의 절망을 끌어안게 하는 것. 감독은 그렇게라도 그들이 진정으로 위로받기를 바란다. 테레사의 학생들처럼 나도 앞이 보이지 않는 삶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서툴게 뜨개질해나가고 있지만 에릭 쿠 감독은 그래도 비뚤어진 나의 스웨터를 기꺼이 입어줄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행복할 거라고 위로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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