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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합술 또한 좋아야 하는 법 <해부학교실>
김도훈 2007-07-11

기술 스탭은 전문의. 감독은 인턴. 시나리오는 의대 지망생. 관객은 카데바

한밤의 해부학 실습실. 호러영화의 무대로 기막히다. 생기없는 인형처럼 포르말린에 찌든 카데바(해부용 시체). 그것들이 놓여 있는 금속성의 테이블과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오래된 핏물. 더욱 소름끼치는 건 한때는 인간이라고 불렸을 실습용 육질에 메스를 들이대는 하얀 가운들의 냉정함이다. 물론이다. 모든 것은 어디선가 이미 다 본 것들이다. 호러영화 팬들이라면 해부실을 무대로 삼는 B급 호러영화 리스트를 끝없이 써내려갈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지독한 클리셰라고 할지언정 해부실의 정경은 말초적인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해부학교실>은 시작부터 반타작을 하고 들어가는 셈이다.

전도유망한 여섯 의대생이 첫 해부학실습을 앞두고 있다. 미친 아빠에 의해 엄마를 잃은 과거를 숨기고 살아가는 선화(한지민), 병원 이사장 아들인 난봉꾼 중석(온주완), 친절하고 사려깊지만 어딘가 음습한 데가 있는 기범(오태경), 실습에 영 자신이 없는 모범생 은주(소이), 심약한 성격을 가진 과체중의 경민(문원주), 의대생이라기보다는 연예인 지망생 같은 지영(채윤서). 청춘드라마가 아닌 만큼 이중 몇몇은 살고 몇몇은 죽어야만 한다. 바들거리던 여섯 의대생은 장미 문신이 있는 여자 카데바에 메스를 가져다댄 뒤 살해당하기 시작하고, 목숨이 그나마 질긴 몇몇은 살아남기 위해 카데바의 정체를 캐고 다니기 시작한다. 당연하게도 아름다운 카데바에게는 한맺힌 우여곡절과 비극의 인생사가 숨어 있다.

시작은 나쁘지 않다. 해부실을 무대로 벌어지는 처음 두번의 살인장면은 머리 긴 원혼을 등장시키면서도 사다코를 슬쩍 비껴나는 재주를 보여준다. 장르팬들이야 구로사와 기요시의 <회로>를 즉각적으로 떠올리겠지만 인용의 효과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의대생 기숙사와 시체 보관함을 오버랩시키는 등의 자잘한 미장센들도 예쁘고 단정하다. <플란다스의 개>의 공동각본가로 잘 알려진 손태웅 감독의 초반 연출은 능숙한 메스질을 뽐내고 싶어하는 인턴의 솜씨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전문의는 메스질이 아니라 봉합술 또한 좋아야 하는 법이다. 스타일리시하게 찢어발기며 시작한 <해부학교실>은 도무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봉합할 줄도 모른채 허둥지둥대더니, 결국엔 슬픈(혹은 슬프라고 강요는 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는) 카데바의 과거지사만 구질구질하게 늘어놓다 막을 내린다. 깔끔한 장르영화를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이 또 다른 ‘한국형 호러영화’ 앞에서 카데바가 된 기분이 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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