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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끝을 따라, 프레임을 건너, 만화 타고 유럽으로~
최하나 2007-07-20

프랑스·벨기에·스위스·노르웨이·독일의 유럽 만화 추천작 6편을 소개합니다.

찜통 더위와 세찬 빗줄기가 번갈아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다. 멀리 달아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일과 학업에 묶여 쉽사리 트렁크를 챙기지 못하는 이들이라면 비행기가 아닌 책장을 타고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누구나 쉽게 머리의 짐을 털어버릴 수 있는 만화, 그중에서도 평소에는 좀처럼 접할 수 없었던 특별한 만화들이 있다. 대여점을 벗어나면 존재하는 신천지, 바로 유럽 만화다. 주로 대형 서점의 귀퉁이에서, 온라인 서가와 만화 동호회를 통해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유럽 만화 중 굳은 머리와 가슴을 시원하게 풀어줄 6편의 작품을 꼽아보았다. 흔히 유럽 만화의 대표주자로 알려져 있는 프랑스 만화부터 알프스를 경유해 머나먼 스칸디나비아의 나라 노르웨이의 만화까지, 세계 각지에 숨겨져 있던 보석 같은 만화들을 든든한 바캉스 티켓으로 제공한다.

아픔과 상실로 내딛는 한 소년의 성장기

노르웨이의 만화, 제이슨의 <헤이, 웨잇…!>

초인종을 누르고 돌아서서 도망가기, 벌거벗은 여자 사진 몰래 쳐다보기, 행인들의 얼굴에 구슬 날리기. 철없는 장난으로 유년의 다리를 건너고자 하는 소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뜻을 함께할 동지다. <헤이, 웨잇…!>의 욘에게는 그래서 그림자같이 자신의 곁에 선 단짝 비욘이 있다. 어느 날 새로운 모험의 단초로 배트맨 팬클럽을 조직할 것을 도모하는 소년들. 그러나 팬클럽 가입의 관문으로 욘이 제시한 장난은 생각지 못했던 결과로 이어지고, 소년들의 나른했던 유년기는 한순간에 차가운 종말을 맞는다.

<헤이, 웨잇…!>은 ‘제이슨’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노르웨이 만화가 욘 아네 새테뢰이의 연재물 <Mjau Mjau>를 묶어 출판된 단행본이다. 2002년 제이슨에게 하비상 최우수 신인상을 안긴 <헤이, 웨잇…!>은 같은 해 <타임> 선정 10대 만화 중 2위에 오르며 북구의 낯선 작가를 만화계의 신성으로 부상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똑같은 크기의 정사각형 6컷으로 한 페이지를 채우고, 최소한의 대사를 사용하는 작품의 형식은 소박하면서도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일채의 수식과 설명을 배제한 만화는 담백하게 일상의 지도를 그리는 한편, 어른들을 장대 위에 올려놓고 해골의 방문객을 죽음으로 등장시키는 등 은유와 상징을 곳곳에 심어놓았다. 때로는 점프컷으로, 때로는 흑색의 무지로 벌어진 작품의 행간을 흐르는 것은 쌉싸름한 비애의 감정이다. 아픔을 통해 ‘성장’을 배운 욘을 기다리는 것은 낙천적인 미래가 아닌, 꿈을 상실한 삶의 무게를 홀로 감내해야 하는 쓸쓸한 성숙이다. “헤이, 웨잇…!” 소치려도 기다리지 않는 것은 떠나는 친구의 뒷모습만이 아니라는 것, 지나간 소망도 사랑도 삶도 결국은 그 앞에 총총히 사라져간다는 것을 속삭이는 <헤이, 웨잇…!>은 책장을 덮은 뒤에도 한참이나 떨쳐내기 힘든 먹먹함을 안기는 작품이다.

탐미적 그림이 전하는 위험한 사랑과 미스터리

프랑스·벨기에의 만화, 이슬레르·발락의 <쌍브르>

“붉은 눈의 존재들은 불행과 재앙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들을 사랑하는 자는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리라.” 알 수 없는 기록을 남긴 채 광기에 사로잡혀 스스로 눈을 뽑고 죽음을 맞이한 지방의 한 귀족 남자. 그의 아들 베르나르는 밀렵을 하며 살아가는 소녀 줄리의 붉은 눈에 매혹되어 사랑을 맹세한다. 하지만 줄리는 베르나르의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쓰고, 사고의 와중에 그의 누이는 양쪽 눈을 실명한다. 도망친 줄리를 저주하면서도 동시에 갈구하는 베르나르는 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찾아 파리를 향하고, 허영과 향락 속에 부패해가는 귀족사회의 한가운데에 내던져진다. 생미셀 그랑프리, 시에라국제만화제 최우수 작품상 등을 수상하며 80년대 프랑스의 간판 만화로 주목받았던 <쌍브르>는 벨기에의 대표적인 만화가 이슬레르가 프랑스의 만화시나리오작가 발락과 함께 탄생시킨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현재 5권까지가 소개됐다.

19세기 프랑스의 2월 혁명을 전후로 펼쳐지는 <쌍브르>는 시대적 격랑의 파고 속에 계급이 다른 남녀의 사랑, 붉은 눈과 살인을 둘러싼 미스터리 등 다채로운 극적 요소들을 배합해놓았다. 갑갑하고 위선적인 집안에서 성장한 베르나르가 허울뿐인 귀족의 굴레를 벗고 줄리를 찾아가는 여정은 낡은 지배 체제가 시민의 함성 아래 붕괴해가는 과정과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두 사람의 위험한 사랑을 의미하는 붉은 빛은 굽은 어깨와 찢긴 옷자락 아래 부글대는 혁명의 열정을 가리키는 상징이기도 한 셈이다. 낭만과 광기가 공존하는 <쌍브르>의 질감을 더욱 극대화하는 것은 이슬레르의 탐미적인 그림체다. 소매의 주름, 액자의 잦은 굴곡 하나까지 섬세하게 그려내는 펜선을 채우는 것은 텁텁한 무채색이다. 그 안에서 작품의 테마인 붉은 빛이 배경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기묘한 관능미를 뿜어낸다. 화폭을 펼쳐놓은 듯한 컷을 따라 혁명의 기운이 감도는 파리의 골목길을 헤매어보는 것은 분명 뿌듯한 경험일 것이다.

사랑스러워, 30대 총각의 시트콤식 일상

프랑스의 만화, 뒤피-베르베리앙의 <무슈 장>

시트콤 <프렌즈>의 배경을 프랑스로 옮겨 만화책에 펼쳐놓는다면 이런 작품이 탄생하지 않을까? <무슈 장>은 이제 막 서른을 맞이하게 된 소설가 장을 중심으로, 친구 펠릭스와 아들 으젠느, 연인 캬티 등이 함께 어울려 빚어내는 떠들썩한 삶의 풍경을 에피소드식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99년 앙굴렘세계만화축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한 <무슈 장>은 91년 프랑스에서 첫권이 나온 이래 현재까지 출간이 계속되고 있으며, 그 세월만큼이나 프랑스 사람들의 일상에 오랜 친구 같은 존재로 자리잡은 작품이기도 하다. 한국어판은 불어판 6권을 두권씩 합권해 현재까지 총 3권이 출간됐다.

83년부터 20년 넘게 공동으로 작업해온 필립 뒤피와 샤를 베르베리앙(뒤피-베르베리앙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그래서 종종 한 사람으로 오인받기도 하는)의 손에서 탄생한 <무슈 장>은 일상의 순간들에서 포착한, 시트콤식의 소소한 재미들로 가득하다. 몰래 편지를 슬쩍하는 아파트 수위 아주머니와 신경전을 벌이고, 슈퍼마켓에서 잔뜩 물건을 집어들었다가 지갑을 놓고 와서 쩔쩔매며, 예쁜 여자에게 작업을 걸어보려다 남자친구의 존재를 확인하고 기가 꺾이는, 그런 평범한 순간들이 <무슈 장>의 세계를 관통한다. 청춘이라고 하기에는 머쓱하고, 낭만을 포기하기에는 미련이 남는 30대의 달콤쌉싸름한 일상. <무슈 장>이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그 과도기의 불안함을 기발한 상상으로 표현해내는 유머 감각이다. 서른살 생일을 앞두고 피자를 소화하지 못해 배탈에 걸린 장은 피자들의 공습을 받는 꿈을 꾸고, 결혼에 대한 불안감은 아이를 포탄으로 사용하는 여전사들에 맞서 성을 지키는 장렬한 망상으로 드러난다.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는 <무슈 장>의 좌충우돌이 겨냥하는 것은 소박하지만 따뜻한 일상의 철학이다. 투덜대며 친구 아이의 뒤치다꺼리를 하던 장이 결국 아이에게서 힘을 얻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처럼 <무슈 장>은 30대 남성이 피터팬 콤플렉스를 벗어내는 성장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그려냈다. 머리맡에 놓고 생각날 때 무작정 책을 펼쳐 슬그머니 미소를 띨 수 있는, 편안하고 사랑스러운 온기로 가득한 작품이다.

단단하고 권태로운 삶의 무게

독일의 만화, 아르네 벨스토르프의 <8, 9, 10>

답답하고, 또 답답하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성적은 바닥을 치고, 여자친구는 떠나간다. 크리스토프의 삶은 자신의 바람을 배반하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선택하는 것은 체념이며 방어다.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틈을 허용하지 않는 것. 쉽게 무리들과 어울리며 비디오 게임에 관해 잡담을 늘어놓지만, 결국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진심을 내보이지 않는 것이 소년의 전략이다.

<8, 9, 10>은 2005년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신인상을 수상한 아르네 벨스토르프의 중편으로, 크리스토프의 무기력한 일상과 역시 방향을 찾지 못하는 어머니의 삶을 교차해 그리고 있다. 아들에게 무관심한 어머니와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잠근 아들. 일상의 단면을 예리하게 도려낸 듯 간결한 연출은 불필요한 수식을 소거함으로써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불협화음의 공기를 섬세하게 포착하고, 생명력을 상실한 듯 공허한 얼굴로 일관하는 캐릭터 표현은 무력함의 농도를 더한다. 극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사소한 좌절과 실패들은 일상의 권태와 뒤섞여 숨막힐 듯한 무게로 인물들을 짓누른다. 역시나 상처만을 안고 각자의 작은 여행에서 돌아온 어머니와 아들이 다다르는 것은 함께 손을 맞추어 화분을 내다 놓는 정도의, 아주 작은 화해의 실마리다. 1부터 10까지 칸을 그려놓고 깡총 깡총 뛰어 칸을 밟는 게임. 독일에서 그 시작점은 지옥이고, 도착점은 구름 모양의 천국이다. 크리스토프는 이름 모를 여자아이가 도로에 그려놓은 그 칸 위에 조심스레 발을 내딛는다. 1, 2, 3, 그리고 8, 9, 10. 천국은 분필로 그려진 구름 안에 있고, 하나둘 발을 옮기는 그의 얼굴에 떠오를 미소를 상상하는 것은, 보는 이들의 몫이다. 국내에 출간된 작품집에는 표제작인 <8, 9, 10> 외에도 좀더 압축적인 이미지로 상상을 자극하는 10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정겨움과 유머 사이로 비치는 이란의 역사

이란·프랑스의 만화,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1-나의 어린시절 이야기>

소녀는 선지자가 되고 싶었다. 침대 머리맡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며 선지자를 꿈꾸던 소녀가 10살이 되던 해에, 이슬람 혁명이 터졌다. 소녀는 새카만 베일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친구들과 헤어져야 했다. “제국주의자들을 길러낸다”는 이유로 대학이 문을 닫았고, 마리 퀴리처럼 되고 싶던 소녀의 꿈은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한 이란 소녀의 성장기를 그린 <페르세폴리스>는 이란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마르잔 사트라피의 자전적인 작품이다. 프랑스 친구들에게 이란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시키지 못해 늘 답답함을 느꼈다는 작가는 아트 슈피겔만의 <>를 접하고, 자신의 삶을 만화로 표현하겠다고 결심했다. 프랑스에서 총 4권까지 출간되고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페르세폴리스>는 올해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국내에 출간된 <페르세폴리스1-나의 어린시절 이야기>(이하 <페르세폴리스1>)은 시리즈의 첫권으로, 이슬람 혁명을 중심으로 한 소녀 마르잔의 일상을 담는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탄압, 거리를 메우는 데모의 행렬, 이라크의 침공으로 인한 전쟁의 포화 등 마르잔을 둘라싼 세계는 정치적 격변으로 뒤끓지만, 소녀의 시선으로 그려진 만화는 정겹고 솔직한 목소리로 가득하다. 9년간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삼촌의 이야기를 듣고, 가족 중에 ‘영웅’이 많다며 친구들 앞에서 으쓱해하고, 할아버지의 물고문 이야기에 일부로 목욕탕에 한참 동안 몸을 담궈보는 소녀의 모습은 따뜻한 웃음을 자아낸다. 철없는 장난기로 데모에 합류하다가도, 점차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폭력을 체감해가는 소녀의 이야기는 탄압과 폭력의 역사를 응시하는 진지함과 아이의 시선이 전하는 경쾌한 유머 사이에서 미묘한 무게중심을 잡아냈다. “용서는 해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작가의 말이 암시하듯, <페르세폴리스1>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의 역사, 사람들의 삶을 응시해볼 것을 재치 넘치는 목소리로 권하는 작품이다.

불편한, 그러나 조금 특별한 연인들

스위스의 만화, 프레데릭 페테르스의 <푸른 알약>

열아홉살의 한 저녁, 친구 집의 풀장에서 마주하고 스쳐 지나간 희미한 호감. 6년 뒤 다시 만난 그녀는 이혼을 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조금씩 다가서며 사랑의 감정을 싹 틔우려던 순간, 그녀가 고백한다. “난 에이즈 환자예요.” 절벽에서 떨어지는 아찔함. 그리고 이어지는 고백. “양성이에요. 양성 보균자죠, 내 아들도요.” 스위스의 만화가 프레데릭 페테르스가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그려낸 <푸른 알약>은 에이즈 양성 보균자인 연인 카티와의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낯선 세계에 던져진 작가 자신이 스스로의 삶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불치병에 걸린 여자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전형적인 신파멜로의 틀을 갖추었지만, 작품은 에이즈라는 소재를 극화된 비극의 재료로 사용하지 않는다. 콘돔이 찢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밤을 하얗게 새우는 불안, 아이의 요구르트에 가루약을 꼼꼼히 섞여 먹여야 하는 고단함 등 <푸른 알약>은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들을 차근차근 밟아가며 에이즈라는 질병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마주하는 현실의 난점들을 진솔하게 펼쳐놓는다. 그리고 애써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두 연인의 삶의 모습을 통해 독자의 눈에서 에이즈라는 질병을 죄악시하는 사회의 편견을 살며시 걷어낸다. 종종 불안에 사로잡히지만, 동시에 낯뜨겁게 사랑을 속삭이고, 여행의 꿈에 부푸는 이들은 결국 다를 바 없는 한쌍의 연인이라고. 아니, 혹은 불편하기에 어쩌면 조금은 더 특별한 연인이라고 말이다. 프레데릭의 꿈속에서 매머드가 그에게 전하는 말은 작가가 자신의 삶에 던지는 대답이자 다짐인 동시에, 보는 이의 가슴을 두드리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아마 이 병은 자네한테 최악의 불운이자 최고의 행운이 될 거야. 가장 본질적인 것에 눈을 뜨게 해줄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