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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 이야기꾼의 세계와 글발을 맛보고 싶다면
이다혜 사진 이혜정 2007-07-27

꼭 읽어보면 좋을 미야베 미유키 작품 셋 <화차> <모방범> <이름 없는 독>

현재 한국에서 만나볼 수 있는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대표작으로 꼽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세 작품은 미야베 미유키의 정통파다운 면모를 느낄 수 있는 것들이지만, 가볍게 읽을거리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추리물이라기보다는 명랑소설 같은 면모가 돋보이는 <스텝 파더 스텝>이나 단편집 <나는 지갑이다>나 <대답은 필요없어>도 추천할 만하다.

<화차>

개인파산을 소재로 92년에 쓰여진 소설이지만, 지금 읽어도 시간차를 거의 느낄 수 없는 걸작.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쳐서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자와 그녀에게 인생을 도둑맞게 된 여자의 삶을 진저리칠 정도로 사실적인 필치로 그렸다. 개인파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게 아니라는 미야베 미유키의 시선이 돋보인다. 휴직 중인 형사 혼마 슌스케에게 아내의 조카가 찾아온다. 약혼녀 세키네 쇼코가 사라졌다는 것. 결혼을 준비하던 과정에 신용카드를 만들라고 권한 뒤 그녀의 개인파산 사실을 알게 되어 말다툼을 했는데, 그 이후 그녀가 사라진 것이다. 혼마는 그녀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그녀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진짜 세키네 쇼코는 어떻게 된 것일까? 세키네 쇼코라고 알고 있었던 여자는 어떻게 된 것일까? 혼마가 수사를 해가면서 주변인들에게서 듣게 된 이야기들로 두 여자의 삶이 재구성된다. 큰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고, 다만 현실이 허락하는 것보다 조금 더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욕망이 파국으로 치닫기까지의 내용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한국에서 영화 제작이 준비 중이기도 하다.

<모방범>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중 드물게 천재적 살인마의 연쇄살인사건이 등장하는 책이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연재되었던 글을 묶었기 때문인지 내용의 밀도 면에서는 <이유>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엄청난 분량에도 불구하고 뒤로 갈수록 가속이 붙는 이야기의 흐름과 속도감이 놀랍다. 나카이 마사히로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다층적이고 복잡한 듯하면서도 핵심을 파고들어 흡입력이 있는 미야베 미유키의 ‘글발’을 맛보기 위해서는 원작을 읽을 것을 권한다. 공원의 쓰레기통에서 여자의 팔이 발견된다. 함께 발견된 물건은 팔 주인이 아닌 다른 여자의 가방. 범인을 자청하는 사람의 전화가 방송사로 걸려오는데, 그는 가방의 주인 후루카와 마리코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한다. 사건은 풀리지 않은 채 계속해서 연쇄살인이 일어난다. 피해자들의 시점에서, 그리고 가해자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보여진 다음 속도를 내는 3권에 이르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갖는 폭발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방송을 통한 이른바 ‘극장형 범죄’를 그린 작품이다. 때로는 르포를 읽는 것 같고 때로는 잔혹한 소설을 읽는 듯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을 품는 따뜻한 시선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이름 없는 독>

소시민 탐정 스기무라 사부로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물. 미야베 미유키가 이 시리즈를 앞으로 꾸준히 쓸 생각이라니,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책이기도 하다. 문제가 있다면 스기무라 사부로가 너무 행복한 탐정이라는 사실? 그의 수사의 대상이 된다면 “당신이 인생을 알아?” 하고 소리라도 지르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스기무라는 아내와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내의 아버지는 대기업 회장으로, 기업 경영에 끼어들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사내보 편집자로 일하게 된 스기무라 사부로는 장인의 부탁으로 첫 사건인 자전거 뺑소니 사건을 맡게 되는데 그게 바로 <누군가>의 이야기다. 스기무라는 형사도 아니고 정식 탐정도 아니니 잔혹한 엽기 범죄는 그와 거리가 멀다. 어디까지나 생활인의 자세에서 모든 사건에 임하며, 선량한 인물이니만큼 가해자와 피해자를 쉽게 재단하지 않고 살피려는 시선이 돋보인다. <이름 없는 독>에서는 청산가리에 의한 무차별 연쇄독살사건, 새집증후군, 택지 오염, 자살 사이트, 노인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인 이슈를 끌어들여 지금, 이곳을 선명하게 그려내 보인다. 단순히 줄거리를 요약하기 힘들 정도로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지지만 어느 하나 허투루 넘기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이야기꾼으로서의 미야베 미유키의 힘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