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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FBI 이중간첩의 초상 <브리치>
김혜리 2007-08-29

어느 FBI 이중간첩의 초상. 코드명 ‘악마는 새벽 미사를 본다’

빌리 레이 감독의 <브리치>는 등장인물 대다수가 FBI 요원인데도, 첩보스릴러보다 ‘직업의 세계’나 ‘인간극장’에 가까운 야릇한 영화다. 영화는 이중간첩 행위로 미국 국가안보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미국 스파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FBI 간부 로버트 한센(크리스 쿠퍼)의 체포 직전 마지막 나날을 그린다. 25년 재직기간 중 무려 22년을 이중간첩으로 암약한 한센의 진짜 동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쉬운 짐작은 물론 돈이다. 가톨릭 신자인 그에겐 여섯명이나 되는 자녀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KGB로부터 받은 140만달러의 상당액은 인출 불가능한 계좌로 입금됐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미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를 교란하려는 공산주의자의 신념? 이건 본인이 노발대발할 추측이다. 한센은 바지 입은 여자를 미워하고 성적 소수자를 혐오하는 골수 보수주의자였다.

(<다빈치 코드>에 나오는 바로 그) ‘오푸스 데이’의 단원이었던 한센은 사무실을 가족 사진과 십자가상, 성모상으로 장식하고 묵주 기도로 평안을 찾는다. 여기까지는 퍼즐이 대략 맞는다. 그러나 한센의 은밀한 취미는 여기에 반전을 보탠다. 그는 아내 몰래 찍은 자신의 섹스비디오를 친구들에게 보내고 스트리퍼에 탐닉한다. 25년의 삶을 첩보 활동으로 소진한 인간은 급기야 몸소 미스터리가 되는 것일까. 한센의 매국 혐의를 포착한 FBI는, 야심과 열정으로 충만한 신참 에릭 오닐(라이언 필립)에게 비서로서 한센을 감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오닐은 이 영화에서 벽에 뚫린 구멍의 구실을 하고 관객은 그를 통해 한센의 비밀과 거짓말, 오만과 편견, 절망과 긍지를 훔쳐본다.

<브리치>는 미국 국방장관이 로버트 한센의 체포를 발표하는 뉴스 필름으로 시작된다. 실제 사건을 모르는 미국 밖 관객을 상대로도 “그가 유죄인가? 누명인가?” 게임을 할 의사가 없는 영화라고 못박는 셈이다. 놀라운 점은 그런데도 크리스 쿠퍼의 가공할 연기가, 관객을 홀려서 다시 바보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결론을 뻔히 듣고도 혹시나 긴가민가해지는 것이다. 로버트 한센은 풀리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미스터리다. 크리스 쿠퍼는 이치에 닿지 않아 보이는 많은 요소들을 한 인간의 가죽 안에 태연자약하게 밀어넣음으로써 극도로 괴팍하기에 남에게 설명해봤자 이해받을 한 오라기 희망도 없지만 그 자신에겐 일관된 원칙을 가졌으리라는 점을 납득시킨다. <브리치>의 크리스 쿠퍼는 좋은 배우가 한 영화의 단순한 잠재력을 성취의 레벨로 끌어올리는 힘을 발휘하는 예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영화는 CIA 요원의 일대기를 그린 로버트 드 니로 감독의 최근작 <굿 셰퍼드>다. 그러나 <브리치>는 <굿 셰퍼드>처럼 비장미를 꾀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FBI는 그저 월급쟁이 공무원이다. 그들의 사무실은 우중충하고 비품은 초라하다. 조너선 드미 감독의 카메라맨으로 친숙한 닥 후지모토는 마치 제복과 같은 무미건조한 스타일로 <브리치>를 찍었다. 오닐을 첫 대면한 한센은 “자네에 관해 다섯 가지 사실을 말해보게. 그중 넷은 진실이어야 해”라고 인사를 건넨다. 마치 지폐 세는 솜씨를 습관적으로 과시하는 은행원처럼. 한센이 언뜻 표출하는 불만 역시 주로 신념보다는 조직운영에 관련된다. 그는 정보 부서 출신들이 경찰에서 온 ‘총잡이’들에게 끝발이 밀리는 풍토에 신물을 낸다. 이 대목에서 관객은 한센의 배신 동기가 어쩌면, 무능한 조직을 능멸하고 싶은 전문가적 허영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과연, 체포된 순간 그의 일성은 다음과 같다. “GPS(위성항법장치) 점검 좀 하게.” 한센을 체포하려고 칼을 가는 FBI 동료들의 심리적 동기 역시 애국심은 아니다. 오닐의 상관 버로우즈(로라 리니)는 어느 순간 화를 억누르지 못한다. “그는 우리가 한 모든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었어!”

<브리치>의 클라이맥스는 한점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오닐과 한센이 신뢰와 의심을 오가며 벌이는 줄다리기는, 한센이 체포되는 극적 클라이맥스가 오기 전에 이미 절정을 지나친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의 분열은 영화에 치명적 타격을 주지 않는다. <브리치>의 목표는, 인간이라는 미스터리야말로 거대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 효율을 원칙으로 철저히 조직된 세계의 영원한 구멍(breach)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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