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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샤인> -개그맨 김현정
2007-09-07

천재, 그 무거운 이름

<샤인>, 천재 피아니스트라 불리는 데이비드 헬프갓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어림잡아 10년은 지난 영화, <샤인>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난 언제나 호들갑을 떨며 이 영화를 자랑하고는 한다.

중학교 2학년 여름. 피아노를 치고 있는 남자의 옆모습에 이끌려 <샤인>을 만났다. 사실 영화를 본 그날의 기억은 별로 없다. 어느 영화관에서 봤는지, 팝콘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그리고 누구랑 봤는지…. 그날의 기억은 오로지 <샤인>이라는 영화만으로 반짝거린다. 천재를 다룬 영화는 한해에도 몇편씩 쏟아져 나온다. 천재들의 삶이란 게 천재가 아닌 사람들의 삶보다는 뭔가 특별하거나 극적이라는 생각 때문이겠다. 그런데 나는 <샤인>의 주인공 헬프갓이 천재라는 데에는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첼리스트 장한나(요즘은 지휘도 하지만)가 어렸을 때 TV에서 장한나 어머니와 인터뷰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다른 건 모르겠고 딱 하나 기억하는 게 있다. 그 어린 장한나(나랑 동갑인데)가 첼로 연습을 하루에 8시간이나 한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하루에 8시간씩 투자한 일을 못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천재란 <노다메 칸타빌레>에 나오는 노다 메구미처럼 한번 들은 곡을 아무런 준비없이 단 한번에 똑같이 쳐내는 아이만이 진정한 천재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장한나도 천재라고 단번에 말하긴 껄끄러워진다. 첼로가 좋아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연습하는 아이에게 천재란 이름은 그 시간과 수고를 덜어내는 것만 같아서 입이 쓰다.

데이비드 헬프갓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압박이 있긴 했지만 그도 피아노를 사랑하는 어린아이였을 뿐이다. 이 꼬마 아이는 아버지에게 기쁨이 되고 싶어서 콩쿠르에 나가는 착한 아이였고, 수상을 못할까 두려워 굴러가는 피아노를 따라 연주를 하는 여린 아이였다. 하루에 반 이상을 피아노 치는 데 보냈을 아이를 타고난 천재라고 해도 될까, 라흐마니노프를 치기 위해 하루 종일 매달리는 청년을 천재라는 말 한마디로 설명을 끝낼 수 있단 말인가. 라흐마니노프를 성공적으로 연주한 뒤에 자신을 놓아버린 그를 천재의 광기라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그에게 천재란 이름은 자칫 무겁기 만한 명찰은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의 나는 너무도 단순하게 그 장면을 보고서 ‘너무 열심히 연습해서 미쳤다’고 결론내려버렸다. 그땐 그게 뭘 말하는지 몰랐었고, 음악 때문에 미친 남자가 서서히 재기하는 모습이 더 감동적이었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다. ‘열심히 연습해서 미친’ 남자 때문에 10년이나 가슴에 품었다고 말하려니까 입이 깔깔해서다.

아, 그래! 나는 헬프갓을 연기했던 배우 제프리 러시에게 반해서 이 영화를 기억한다고 말해야겠다. 영화 <샤인>의 헬프갓과 <퀼스>의 사드, <캐리비안의 해적>의 바르보사 선장이 동일인이라는 걸 혹시 알고 있는지? 두 번째 영화로 전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려놓고도 유명세를 즐기기는커녕 알고 봐도 못 알아보게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그 남자를 어찌 사랑치 않을 수 있으랴! 그처럼 다양한 변신을 거듭하는 배우를 만나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 때문인지 한때 나는 제프리 러시 같은 배우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오래전 나는 폐업 정리하는 비디오 가게에서 <샤인>을 찾을 수 있었고 내 책장 한구석에 고이 모셔두었다. 그 이후로 한번도 그 비디오테이프를 꺼내보지 않은 것은 그날의 감동이 변해버릴까 두렵다는 비겁한 변명 때문이다.

단 한번의 만남으로 오랜 울림을 주는 이 영화, <샤인>은 나에게 이젠 더이상 재기에 성공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꿈과 가족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년의, 또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마저 뛰어넘어야 했던 고독한 영혼의 지독하리만치 힘겨운 싸움을 다룬 영화로 변했다.

나도 가끔씩 내가 지금 서 있는 오늘 이 시간이 힘든 싸움임을 감지할 때가 있다. ‘난 천재가 아니라서 모르겠어, 될 대로 돼라지’ 한마디로 결론내리고 도망가버릴까 고민할 때, 그때 난 신나게 트램펄린을 타던 헬프갓을 떠올린다.

무대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피아노를 치던 청년 시절의 데이비드 헬프갓은 사진 한장으로 나를 사로잡을 만큼 열정적이었지만 그날 그의 삶이 즐거웠을 거란 생각은 못하겠다. 그보다 나는 작은 레스토랑 구석에서 리듬을 타며 피아노를 연주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트램펄린 위에서 뛰어놀기도 하고, 바다를 보고는 좋다고 뛰어들고, 수영장에 들어가 물 위에 악보를 던져놓고 즐거워하며, 사랑하는 여자 품에 안겨 웃을 줄도 아는 그의 삶이 더욱 즐거울 거라고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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