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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회색의 모험
2001-10-25

이수명 시집 <붉은 담장의 커브>

문학평론가이자 이화여대 교수 이어령은 퇴임강연에서 “회색 지대야말로 창작의 공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회색주의’라기보다는 ‘주의=회색’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어쨌거나 그렇다면 더욱, ‘회색’ 자체보다는 ‘회색’과 ‘공간’의 어울림 혹은 상간(相姦)이 더 의아하다. 왜냐하면 회색은 (정치와 무관한) 장소개념이 아니라 (정치 속에서의) 태도 개념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논리적 신조와 관계없이 회색인이다. 왜냐하면 그는 정치 속에서 자신의 논리 혹은 신조를 정치와 구별되는 ‘예술의’ 방법으로 구사하며 심지어 그 결과물은, 예술적 형상화의 특수성 때문에 자신의 신조를 배반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복고적 세계관을 지녔던 발자크 소설의 시민적 리얼리즘.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예술가의 태도는 무정부주의적이지만 감동을 향해 스스로 응집한다는 점에서 내용이 볼셰비키적이다. 그렇게 볼 때 비로소, 정치적 회색의 모험 속에서, ‘모든 진정한 예술은 회색’이라는 정의가, ‘모든 예술은 정치’라는 정의만큼이나 당연한 것으로 된다.

시집 제목에 ‘붉은’이 들어가서였을까? 민음사에서 펴낸 이수명의 신작시집을 보면서 나는 그런 ‘회색’을 떠올렸다. 그런데 표4글 모두에서 문학평론가 신철하는 이렇게 썼다. 이수명은 우리 문학을 설명하는 다른 문법을 통해 주목받아야 할 시인이다…. ‘다른 문법’이라. 이수명의 시가 난해하고 독특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또다른 장소개념(물론 이어령보다는 더 문학 내적인) 아닐까? 김수이는 표4글의 말미에서 또 이렇게 썼다. 의미의 완전한 몰락을 입증한다. 잠시 저 유명한 비유를 빌리자면,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것은 시간이 아니며, 사건이 아니다!… 의미의 몰락이라. 이수명의 시가 한국현대시의 가장 과격하고 전면적인 시공감각(時空感覺)의 역전 혹은 파탄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지만 그 모든 것이 이루는 ‘느낌의 그림’은 당대의 젊은 시인 누구 못지않게 첨예한 ‘응집성’을 과시하지 않는가. 가령 첫시 ‘케익’부터.

커다란 케익을 놓고/ 우리 모두 빙 둘러앉았다./ 누군가 폭탄으로 된 초를 꽂았다./ 케익이 폭발했다./ 우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뿌연 먼지 기둥으로 피어오르는 폭발물을/ 잘라서 먹었다.(전문)

이 시가 과연 세상의 현실보다 난해하고 기괴한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가운데 비행기 테러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빌딩이 가라앉고 5500명이 사망했다. 애도할 일이다.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양 삼는 테러는 ‘테러리즘의 도덕’마저 버린 일로 비난받을 일이다. 동시에, 미국의 세계화 전략은 가장 거대한 규모의 테러다. 그리고 경제적 동기는 본질적으로 도덕을 동반할 리가 없다….

이 모든 말은 마땅히 옳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들과 말들의 관계며 관계의 역동성이며, 역동성의 방향이며 그 방향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아니 그전에,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진지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 사람의 죽음 때문에 우리 모두 진지해졌던 때가 있었다. 그 죽음이 이어지고, 진지함 또한 이어졌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수백명의 죽음이 수천명의 그것으로, 다시 수만명의 죽음으로 이어져도 그렇지 못하다. 호들갑이 난무할 뿐이다. 그런 현실보다 위 시가 난해하고 기괴한가?

내가 보기에 이수명은, 형상화의 결과에서는 아직 못 미친다고 하겠지만, 적어도 태도에서만큼은, 열광/ 우울/ 풍자의 3분법으로 사회주의 정치의 ‘예술적 무지’에 대응했던 쇼스타코비치보다 더 ‘예술적으로 정치적’이다.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