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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건담! 미안하다, 사랑한다
2007-09-21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

<기동전사 검담 역습의 샤아>

솔직히 두 가지 선택을 두고 고민했다. 첫 번째는 최대한 어렵고 있어 보이는 영화를 골라서 ‘내가 영화 좀 볼 줄 안다네’라며 예능 PD는 쌈마이라는 인식을 바꿔놓으며 ‘먹물21’의 급에 맞는 글을 쓰는 것. 두 번째는 작품성을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영화를 골라서 ‘그래요, 내 취향 D급이에요. 어려운 영화만 좋아하는 거대한 권력집단 충무로 평론가들 즐쳐드셈’이라며 반(反)먹물 정서를 팍팍 내보이는 것. 어떤 영화가 내 인생의 소중한 영화인가라는 본질적인 고민은 뒤로한 채 자신의 포장만 신경 쓰는 속물적 고민만 하고 있는 나. 이러다간 이 글은커녕 이번주 방송도 못 낼 것 같다! 정신차리고 내 인생 32년을 돌이켜보았다. 그때 떠오르는 한 단어! 이 단어 하나로 앞에서 한 나의 고민들은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가버렸다.

건담! 아직도 ‘샤아 아즈나블’ 피겨를 모으고, 건플라를 조립하며, 건담 관련 게임은 무조건 사놓고 보는 내가 ‘내 인생의 영화’에 다른 영화를 올린다는 건 자기기만이다. ‘미안해 건담… 내가 잠시 이미지 메이킹에 신경 쓰다가 너를 잊을 뻔했구나….’ 초등학생 시절부터 온갖 해적판 서적과 아카데미 플라모델을 통해 <기동전사 건담>과 <기동전사 Z건담>에 푹 빠져 살다가 실제 영상으로 처음 본 건 중2 때였다. 남대문 회현상가 지하에서 불법복사한 극장판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흔히 퍼스트 건담으로 불리는 <기동전사 건담>에서부터 시작된 아므로와 샤아의 숙명적인 대결이 펼쳐지는, 연대기적으로 정통 우주세기 건담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다. 아므로 레이와 샤아 아즈나블은 오랜 인연만큼 공통점도 많다.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고 잊지 못했던 것. ‘중력에 혼을 빼앗긴’ 지구인들이 새롭게 다가오는 신인류, 신세계를 이해해주길 바랐던 것. 인류의 혁신이라는 목적은 같았으나 방법론이 달랐던 둘은 결국 서로에게 총구를 겨눌 수밖에 없었다. 물론 중2 때 이런 걸 생각하며 본 건 아니다. ‘와… 건담 죽이네’, ‘오… 샤아 목소리가 저랬구나’ 이런 생각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도 충격적이었던 건 두 주인공이 모두 죽어버리는 결말이었다. 아므로와 샤아가 우주에서 산화하는 순간의 충격은 고3 때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그것과 같았다. 그렇게 보고 싶던 건담, 아므로, 샤아를 영상으로 어렵게 구해서 봤는데, 죽어버리다니. 이런.

허무함과 상실감으로 중학교 시절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음악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건담을 잊고 살았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어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1999 전시를 보러 갔을 때, 건담과 예상치 못한 조우를 하게 되었다. 바로 건담 플라모델 판매대! 순간 파도처럼 밀려오는 어린 시절의 기억!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므로와 샤아가 다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벌떡 일어나는 기분. 커트 코베인은 죽었어도 그의 음악은 살아 있듯이 아므로와 샤아가 죽었지만 건담 역시…! 뭐 대충 이런 생각을 하며 수많은 플라모델 중 하나를 구입했고, 이는 건담과의 뜨거운 사랑에 불을 제대로 지폈다. 두 번째 사랑은 어린 시절보다 좀더 체계적(건담 시리즈를 연대기별로 감상), 분석적(등장인물들의 관계, 각종 건담들의 설정에 심취), 공간침투적(집에 점점 건담 관련 소품들 증가. 심지어 재떨이까지), 소비촉진적(건담 관련 상품을 공짜로 주는 곳은 없음)이었다. 당시 여자친구가 ‘내가 좋아? 건담이 좋아?’라고 물었을 땐 우물쭈물하는 심각한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차라리 건담이라고 대답했으면 웃고 넘어갔을 텐데 ‘정말로’ 저울질하는 모습에 그 친구는 아마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대학 말년에는 친구들이 건담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 뒤에 ‘오타쿠’라는 직함도 함께.

마이너하고 마니악한 취향의 건담청년은 다행히 본성을 숨기고 MBC에 입사했다.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대중적 취향에 부합해야 하는 공중파 PD의 업무량은 엄청났다. 취미생활은 사치였고, 집에 진열해놓은 건담 플라모델들 위로는 먼지만 쌓여갔다. 적금과 보험료, 대출금 기타 등등…. 건담청년은 어느새 아저씨가 되어가고 있었다. 매일 똑같은 하루의 반복. 2004년, 입사 뒤 2년 만에 처음으로 휴가를 가게 됐다. 뭘 해야 잘 놀았다고 소문이 날까? 그때 또다시 고개를 쳐드는 내 마음속 건담! 그래, 건담의 본고장 일본에 가보자! 우연히 잡지에서 봤던, 도쿄 근교 지바현에 있다는 건담박물관! 잃어버린 동심과 취향을 일깨워줄 그곳! <일본 100배 헤매기>에도 나오지 않는 건담박물관을 겨우겨우 찾아서 성지순례하는 기분으로 들어갔다. 평일이라 관람객은 한명도 없었고 아므로 레이 등신대 동상이 소박하게 서 있었다. 왠지 모를 미안한 기분. 아므로 레이에게 미안했을까? 아니면 그동안 잊고 지낸 내 추억에 미안했을까?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 동상이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이제 왔구나….’

오윤환/ MBC <무릎팍도사>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