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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고 성공적인 복합장르 <궁녀>

장금이들의 혈투가 왕의 권력보다 무섭다

푸른 달빛 아래 송연하게 뻗어 있는 궁 안으로 우리는 홀리듯이 빨려들어간다. 거기에는 왕의 이야기가 있지 않고 궁녀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다 듣지 않고 궁을 벗어날 수 없으며 궁의 문이 하나 둘 차례로 닫힐 때에야 우리의 시선은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그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궁에 갇힌 자들을 쫓아 시선을 움직이고 추리를 동원하는 것, 그러니까 오로지 이 내부의 이야기를 듣게 하는 것이 <궁녀>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닫힌 공간에서 살인과 배신이 횡행하기 때문에 미스터리 추리극의 긴장은 늘 가중되는 것이다. 또한 사태가 끝나기 전까지 폐쇄의 장소를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건 오랜 호러 장르의 법칙이기도 하다. <궁녀>는 폐쇄된 공간에서의 의문스런 범죄라는 오래된 장르적 과제를 팽팽한 긴장력으로 해내는 미스터리 사극이며 호러물이다.

궁에 살고 있는 자들은 모두 왕의 것이다. 수도사가 신의 소유인 것처럼 궁녀는 왕의 소유다. 그렇다면 왕과 궁녀들의 이야기가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왕은 여기서 배제된다. 아니 남자라는 성별이 아예 배제된다. 궁에는 욕망하거나 위험에 처한 여자들(희빈과 궁녀들)과 그녀들 중 일부를 희롱한 나쁜 놈(왕의 조카)과 왕, 이렇게 세 부류의 인간만이 살고 있을 뿐이다. 그중 왕의 역할은 가장 미약하다. 그는 영화의 초반부를 열어주는 한밤의 정사를 보여주기 위해 잠시 등장할 뿐 서사의 중심으로 들어서지 않는다. <궁녀>의 서사의 주도권은 그 여자들에게 있으며 혹은 여자들과 그 나쁜 놈이 맺은 사연에 있다. 정사의 한 귀퉁이를 오리고 자른 새로운 야사는 거기서 벌어진다.

시체로 발견된 건 월령(서영희)이다. 그리고 그 시체를 검진하게 되는 건 의녀 천령(박진희)이다. 비록 목매단 시체로 발견되었어도 천령은 월령이 타살된 뒤 위장된 것임을 직감한다. 하지만 감찰상궁(김성령)은 소문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다. 희빈(윤세아)의 위세에 해가 갈까 숨기려 한다. 반면 천령은 이 일이 왕의 조카가 저지른 나쁜 행실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더 맹렬히 사건을 탐문한다. 그녀도 그에게 같은 일을 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월령을 시기하던 정렬(전혜진)은 죽은 월령의 허리춤에서 노리개를 훔쳐간 뒤고, 벙어리 옥진(임정은)은 말 못하는 죄로 갖은 고초를 당한다. 여기에 아직 말해서는 안 되는 희빈과 그의 가족사가 개입한다.

사건을 수사하는 주인공 천령은 의녀이면서 탐정이면서 기호학자다. 죽음이 남긴 흔적을 조합해 진실을 찾으려는 궁 안의 유일한 자다. 그런 점에서 서양의 전설이건 한반도의 고전이건 혹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궁녀>가 장르 조합의 벤치마킹인 것처럼 보이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인물들이 이제 우리는 익숙하다. 그러나 천령이 의녀라는 사실, 즉 <대장금>을 비롯해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궁 안의 어떤 하층적 인물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 의녀는 명석하고 투지가 불타는 용사의 기질을 지녔으므로 단순히 장금이가 아니고 민완의 탐정 장금이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 장금이의 착한 매력이 매너리즘이 된 이때에 새로운 여자 탐정의 상을 <궁녀>는 고안해본다. 여기 이 인물에 더해지는 실마리, 그것이 모성애다. 월령이 죽음에 이르는 동기와 천령이 사건에 집착하게 되는 이유가 잉태와 모성이라는 두 가지 코드로 결합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영화가 비장의 카드로 제시하는 것이 희빈에게 얽힌 자매애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서사 기술적으로는 이 자매애의 제시가 시종일관 팽팽하던 <궁녀>를 느슨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지만, 지금 주시할 건 모성애와 자매애가 어떻게 서사를 진전시킬 것인가 예상해보는 것이다. 그건 모두 여성의 것이다.

<궁녀>는 한 가지 재주에 모든 것을 걸고 매진하다 그것이 안 되면 갑자기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겁쟁이 장르영화가 아니다. 호러 장르의 그늘이 있다는 핑계로 몇몇 장면이 모호하게 넘어가는 부분이 있는 느낌이지만, 무엇보다 성실한 장르적 조합의 노력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며 그것으로 대중적 에픽을 즐기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통해 숨겨진 궁녀들의 역사와 삶을 말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건 믿기 어렵고 그렇게 말하면 스스로 보여준 재주마저 버리는 것이다. <궁녀>는 흥미롭고 성공적인 복합장르다. 그게 이 영화의 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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