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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2007-10-19

내가 변하더이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다. 소년 시절의 기억이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애틀랜타 어딘가 남북전쟁의 불길이 온 화면을 시뻘겋게 하고 위험천만하게 마차를 타고 나오는 스칼렛 오하라와 레트 버틀러. 그리고 그들의 맹렬한 키스신. 한명의 부상병에서 카메라가 서서히 공중으로 치켜올라가더니 끝없이 이어지는 남부군 야전병원의 참혹하고도 원대한 부감숏.

그런 모든 스케일보다 더 매력적인 장면은 스칼렛의 발목이 오두방정을 떠는 발랄함에 있었다. 스칼렛은 원래 애쉴리를 사모했지만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자 복수하는 심정으로 딴 남자와 결혼한다. 그렇게 엉겁결에 결혼한 남편이 전사한 뒤 상복 입고 참석한 무도회에서, 춤판을 보며 스칼렛 자신도 모르게 발은 움직인다. 카메라는 스칼렛의 점잖은 표정과 상체를 보여주다가 여지없이 발목으로 틸다운하며 문제의 오두방정 발목에서 멈춘다. 세상의 관습과 예의의 틀에 갇혀 있는 근엄한 상체와는 정반대로 스칼렛의 무릎 아래가 보여주는 청춘의 열정. 요즘 말로 하자면 그야말로 ‘상체와 하체의 본능적인 부조화’! 하여간 스칼렛보다 예쁘고 귀여운 여자는 정말이지 없었다. 철없던 시절에는 스칼렛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철이 좀 들까 말까 한 청년 시절, 나는 그 영화에서 하녀들을 보았다. 타고날 때부터 노예로 길들여진 뚱보 흑인 유모, 그리고 젊은 나이에도 어린애 목소리를 내는 철부지 성격의 흑인 처녀. 소년 시절에는 그들이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웃고 말 뿐인 그런 존재들이었다. 그런 못난이들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저 소품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캐릭터들의 정체성에 의문이 들었다. 하찮게 여겨지는 사람들이라도 그들의 고유한 삶이 있지 않을까? 왜 백인들에게만 사랑이 아름답게 그려진단 말인가? 이 영화에는 현실의 계급이 있기나 한 것일까?

영화에 감추어진 남북전쟁의 구조적인 모습들과 시대상들이 하나둘씩 내 심기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남부의 넓은 목화 농장을 이어받을 백인 청년들, 그들이 보여주는 경망스러운 엘리트 의식들이 점점 더 내 비위를 거슬리기 시작했다. 스칼렛의 미모와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에만 가던 눈길이 순식간에 영화 전체의 ‘시대정신’을 의문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의심이 발동하기 시작하면 한순간에 사물의 인상이 바뀌게 마련이다. 영화는 전혀 색다른 풍경으로 내게 다가왔다.

영화는 변하지 않았는데, 내 해석은 달라지는 것이다. 한 영화 속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관심을 끄는 인물이 교차되고 있다. 10년의 세월마다 그 영화의 주인공들이 적어도 내게만은 바뀌어온 셈이다. 요즘에는 다른 사람이 보인다. 클라크 게이블이 열연한 버틀러! 철없던 시절에는 ‘방탕한 바람둥이’로만 보였고, 청년 시절에는 ‘느끼한 부르주아 사업가’로만 보였다. 그런데 아내가 된 스칼렛에게 보여준 버틀러의 질투와 아이들에 대한 친절 그리고 그가 보여주는 묘한 인간관계의 매력들, 뭐 이런 것들이 건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나치게 전형적인 캐릭터라서 정이 안 가던 인물이었는데, 좀 달리 보인다.

내가 나이를 먹어가는 것인가? 하긴 요즘엔 영화관에서 찔끔찔끔 우는 걸 보면 그건 틀림없는 것 같다. TV프로그램을 보다가도 졸졸 눈물이 흐른다. 세상에는 참 많은 영화가 있다. 어떤 영화는 두번 보아도 그저 느낌없는 재방송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어떤 영화는 여러 번 보아도 그때마다 뉘앙스가 달라지기도 한다. 안 들리던 배경음악이 새삼스럽게 귀에 울리기도 하고, 최고라고 믿었던 이미지가 한철 유행에 불과했던 것으로 판명나기도 한다. 이것은 가벼운 내 변덕인가? 아니면 직관이 심오하게 발전해가는 것인가?

누구나 내 인생의 영화를 몇편씩 가지고 있다. 남들은 그저 그렇다고 말해도 내게는 어딘가 특별한 사연과 감정이 있는 영화들이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어린 시절 내 눈을 매혹시켰고, 그 뒤로도 두고두고 내게 말을 걸고 있다. 거기에는 인생의 많은 요소가 숨겨져 있다. 돌아보면 영화는 달라진 게 없는데, 내가 변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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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수/ MBC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