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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성냥공장 소녀> -윤성희
2007-11-09

어떻게 하면… 여길 벗어나지?

어제 산책을 하다가 나무 한 그루를 보았어. 나는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지. 어떤 나무였기에 내 발목을 붙잡았냐고? 글쎄, 설명을 하자면 할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네. 대신 어릴 적 너희 집 마당에 있던 나무를 상상해봐. 요즘 나는 설명을 하는 일을 멈추었어. 그러자 그냥 가만히 나무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 예전 같았다면 ‘나무를 바라보는 그녀(혹은 그)’를 떠올렸을 테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고민했겠지. 그때 나는 사물을 볼 때마다 그것을 문장으로 바꾸고 싶어했고 번번이 좌절했어. 언어로 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라는 표현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그런 의문들이 내 머릿속에 들어차기 시작했지. 그러자 어떤 문장도 쓸 수 없는 상태가 찾아왔어. 그 슬럼프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몇권의 책과 어떤 영화 한편이야.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성냥공장 소녀>를 보게 된 것은 우연이었어. 마침 빌리려던 영화가 대여 중이어서, 나는 할 수 없이 옆에 꽂혀 있는 영화를 꺼내보았어. 감독 이름이 낯설었지. 내가 그날 그 영화를 빌린 것은 순전히 감독의 이름 때문이었어. 자음 ㅋ이 세번이나 나오잖아. 우리나라 이름에선 불가능한. 영화를 다 본 다음, 나는 말없이 저녁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었지. 그리고 자기 전에 다시 한번 영화를 보았어. 두 번째로 영화를 보면서 나는 종종 리모컨의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지. 퇴근길, 이리스는 전차 안에서 책을 읽지.그때 이리스는 아주 잠깐, 그리고 아주 살짝, 웃어. 책이 입술을 가려서 이리스의 미소를 다 볼 수는 없어. 입술 끝이 올라가는 것만 볼 뿐이야. 나는 그때의 이리스 얼굴을 좋아해. 엄마가 딸의 접시에 놓인 고기를 집어갈 때의 장면도 좋아. 나는 그 영화를 통해 말을 아끼는 방법을 배웠어. 만약 가능하다면, 가시만 남은 생선처럼,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또 나는 그 영화를 통해서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을 배웠어. 부모님이 부엌에서 죽어가는 동안 그녀는 거실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음악을 듣지. 카메라는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 그녀가 차에 몸을 던질 때 카메라는 벽돌이 부서진 건물 벽과 홈통만을 보여주지. 드러난 것과 감추어진 것 사이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어. 그렇다면, 소설에서도, 문장과 문장 사이에 많은 이야기들을 감출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나는 그 영화에서 유머감각도 배웠어. 쥐약을 사면서 이리스와 약국 여자가 나누는 대화 말이야. 안 웃기니? 난 그런 식의 대화가 좋던데.

<성냥공장 소녀>를 두번 보고 난 뒤 나는 바로 비디오 가게에 반납을 했어. 그러면서 가게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지. “이 테이프 저한테 파세요.” 6개월 뒤 가게 주인은 테이프를 나에게 팔았어. 그동안 아무도 그 영화를 빌려가지 않았거든. 그건 그렇고 내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게 뭔지 아니? 소녀의 분홍색 머리끈이야. 긴 머리 소녀는 그보다 더 예쁜 머리끈을 가져야 해. 내가 소녀의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딸에게 머리끈 하나 사주지 않았기 때문이야. 어머니란 딸에게 ‘더 나은’ 곳을 꿈꿀 수 있도록 해줘야 해. 꿈꿀 수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곳을 벗어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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