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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형형한 실존에 대한 영화 <색, 계>

삶은 ‘지금 여기’와 ‘기타 등등’으로 나뉜다.

그러니까 <색, 계>는 육체의 형형한 실존에 대한 영화다. 생(生)의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치열한 길항작용에 대한 영화이고, 지루한 세월이 폭발하는 찰나에 맞서 힘겹게 싸움을 벌이는 영화다. 혹은 시간은 불균질하고 공간은 윤회한다. 그리고 삶은 ‘지금 여기’와 ‘기타 등등’으로 나뉜다.

1938년 홍콩. 대학 연극반에 가입한 왕치아즈(탕웨이)는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일본에 맞서 애국적 저항 활동을 벌이려는 광위민(왕리홍)에게 매료된다. 광위민이 친일파 핵심 인물인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이에 동조한 왕치아즈는 신분을 위장하고 미인계를 써서 이의 아내(조안 첸)에게 접근한다. 처음 본 순간부터 이와 왕치아즈는 서로에게 강렬히 이끌리지만, 급작스레 이가 상하이로 발령이 나 옮기는 바람에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1941년 상하이. 강력한 항일단체에서 활동하게 된 광위민이 평범한 생활로 돌아간 왕치아즈에게 3년 만에 찾아온다. 치밀하게 짜인 새로운 암살 계획을 듣고 왕치아즈는 다시금 이에게 접근한다.

리안은 몸이 일으키는 파장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쿵후 선생>에서 많은 일을 겪은 노인은 무술을 가르치며 마음을 다스리고, <라이드 위드 데블>에서 참혹한 전쟁을 치른 소년은 긴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한 시절과 이별한다. <헐크>에서는 몸의 급격한 변형을 통해 마음의 극심한 혼란을 그려냈고, <음식남녀>에서는 미각의 변화를 빌려 가족의 의미를 재정립했다. 그리고 <아이스 스톰>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을 거쳐 <색, 계>에 이르는 동안 리안의 어떤 영화세계는 점점 더 격정에 사로잡히고 있다.

<아이스 스톰>이나 <브로크백 마운틴>처럼 탁월한 리안의 대표작과 비교할 때, 사실 <색, 계>가 마냥 찬사를 연발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아마도 리안의 가장 뜨거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색, 계>가 제대로 통제된 우아한 스타일과 인상적인 몇몇 장면들을 지닌 매력있는 대중영화라는 점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모두가 이야기하는 <색, 계>의 베드신은 과연 강렬하다. 이 영화의 섹스신 연출은 파격적인 동작을 섬세하게 연결하는 일종의 ‘안무’라는 점에서 <와호장룡>의 무술장면 연출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영화의 에로스는 침대 위에만 존재하진 않는다. 왕치아즈가 커피를 마신 뒤 립스틱 자국을 잔에 남기거나 향수를 귀 밑에 슬쩍 뿌릴 때에도 리안은 카메라 뒤에서 큐피드의 화살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왕치아즈와 이가 온몸으로 만나는 세 차례의 장면은 폭력적이고 과시적이지만, 이야기 흐름이나 인물의 심리에 단단히 밀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훌륭하다. 파격적인 섹스신이 있는 양조위 주연의 또 다른 영화는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였다. 그 작품에서 왕가위는 강도 높은 롱테이크 베드신을 영화의 첫 장면으로 삼았다. 리안은 <색, 계>에서 러닝타임 90분을 흘려보낸 뒤에야 일련의 강력한 베드신들을 모자이크하듯 묘사한다. 베드신의 영화 내 위치나 촬영 및 편집 방식의 차이는 왕가위와 리안이 어떻게 다른 영화적 지향점을 갖고 있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이글거리는 내면의 불을 차갑고 강인한 외양 속에 감춘 연기의 품질도 좋지만, 이 영화의 양조위에게 정말로 감탄스러운 것은 작품을 대하는 자세다. 탕웨이는 이 작품이 스크린 데뷔작이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입체적이고 고혹적이다.

<색, 계>에서 폭발적인 베드신 못잖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살의와 욕망이 교대로 휘몰아치는 격정의 순간이 어찌어찌 흘러간 뒤 홀로 남은 왕치아즈가 거리로 나서는 장면이었다. 인력거 뒷자리에 탄 채 한적한 거리를 잠시 달릴 때의 기묘한 정적. 경찰에 의해 길이 잠깐 통제되자 옷깃에 숨겨놓은 독약 캡슐을 만지작거리던 그녀 입가의 작고 짧은 미소. 이 무기력한 나른함이 주는 안온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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