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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빨강머리 앤> -이윤정PD
2007-11-30

괜찮아, 내 친구 앤이 있잖아

새벽에 가까운 늦은 밤, 알딸딸한 상태로 현관문을 열고 비틀 들어와 불을 켠다. 불을 켠 거실은 밝지 않다. 불을 켜지 않은 곳곳이 검게 남아 있어 거실에 스며들어서이다. 외롭지도 않은데 외롭다고 느낀다. 그냥 자도 되는데 조금만 응석을 받아주면 더 행복하게 잠들 것 같다. 담요를 두르고 누워 DVD플레이어에 파워를 넣는다. <빨강머리 앤>을 집어든다.

‘빛나는 호수’ 옆엔 병아리색으로 칠해진 다이애나의 집이 있다. 그 집 뒤로 작은 숲이 뻗어 있고 그 끝엔 개울이 흐른다. 개울 위엔 한쪽 난간만 있는 통나무 다리가 있다. 앤과 다이애나가 서로를 바래다주다 헤어지기 싫어 난간에 기대 얘기하는 곳이다. 그 다리 앞으로 앤이 초록색 지붕 집까지 뛰어가는 언덕이 있고 집 앞엔 눈의 여왕이란 벚나무가 한 그루 있다. 앤이 현관문을 활짝 열고 뛰어든다. 마릴라는 난로 겸 오븐 위에 얹힌 스튜냄비를 저으며 엄격하게 말한다. “앤, 오기로 한 시간을 잊었니? 넌 저 앞에 서서 다이애나랑 30분이 넘게 떠들었어. 대체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냐?” 그러면 앤은 높은 목소리로 재잘재잘 얘기한다. 팔을 걷고 도시락 가방의 우유병을 꺼내 싱크대로 가서 펌프질을 해 우유병을 씻어 뒤집어놓고 행주를 뜨거운 물에 삶아 놓으며 계속 얘기를 한다. 앤의 목소리는 거의 뭔가에 감격한 톤이다. 마릴라는 아까보다 더 크고 강한 목소리로 말한다. “앤! 언제까지 그렇게 떠들고 있을 거냐? 너 팔 위로 물이 뚝뚝 떨어지잖아.” 앤은 “어머” 하고는 물기를 닦고 다시 재잘재잘 얘기를 한다. 그러다 마릴라는 앤의 과장된 표정과 말투 한곳에 걸린다. 열심히 참다 이내 얼굴이 일그러지고 입이 벌어지며 쿠쿠우우욱욱~ 웃음이 터진다. 숨을 헐떡거릴 정도로 길게 웃는다.

손님용 거실쪽으로 난 현관문 바깥으론 넓은 감자밭이 있다. 젊은 일꾼과 함께 매튜는 기다란 괭이를 들고 밭을 간다. 점심과 저녁 사이 차를 마시는 시간이 앤이 학교에서 돌아올 무렵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앤과 마릴라가 차려놓은 두 가지 파이와 쿠키와 차를 마시러 매튜가 들어온다. 오버롤 바지에 긴 장화를 신은 매튜는 현관 앞 깔개에 장화의 흙을 털고 나무로 만든 받침대에 장화 뒤꿈치를 넣어 한짝씩 벗는다. 느릿하게 걸어와 식탁에 앉으면 앤은 마릴라에게 했던 얘기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매튜는 앤의 말끝마다 대답한다. “그렇구먼~.” 낮고 쉰 듯한 목소리로.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앤은 방으로 올라가 촛불을 켜고 책을 본다. 그러다 다이애나가 궁금해지면 창가에 촛불을 놓고 마분지로 촛불을 가렸다 놨다 신호를 보낸다. 신호 다섯번이면 ‘할 얘기가 있으니 어서 와 봐’라는 뜻이다. 숫자에 따라 다른 뜻이 있다. 앤은 보통 아침 일찍 일어난다. 아침에 일어날 땐 침대에서 튀어오르듯이 일어난다. 창가로 달려가(그 작은 공간에서도 앤은 보통 달린다) 창문을 열고 눈의 여왕에게 인사하고 바닥에 핀 꽃들을 본다. 그 앞을 지나는 고양이 세 마리를 보다 저 멀리 다이애나 집쪽을 본다. 반짝이는 호수가 아름답게 반짝거린다. 하늘의 구름엔 아직 주황빛이 묻어 있다. 으다다 몸을 떨며 창문을 닫고 방 안에 있는 세숫대야에 물을 부어 고양이 세수를 하고 원피스를 머리부터 넣어 주욱 내려 입는다.

앤과 다이애나가 학교 가는 길은 사과밭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이다. 앤은 나무 울타리 위로 뛰어넘고 다이애나는 틈새로 비스듬이 기어 넘는다. 학교 건물은 한칸의 통나무집이다. 여름이면 아이들은 그 옆 개울가에 우유병을 차갑게 담가둔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올 땐 교실 안에 봄의 소리가 들린다. 꾸다다당 거대한 소리가 들리고 이어 창밖으로 눈더미가 쏟아진다. 겨우내 지붕 위에 쌓여 있던 눈더미가 한번에 미끄러져 내리는 광경이다. 학교를 마치고 앤과 다이애나는 둘의 놀이터로 간다. 자작나무들이 동그랗게 처진 곳에 응접실을 꾸며 놓았다. 나무토막을 얹어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깨진 찻잔과 그릇을 주워다 올려놓고 생일 선물로 받은 초콜릿 세알을 나눠 먹는다. 빨간 셀로판지와 파란 셀로판지를 오려 번갈아 하늘을 본다. 빨갛게 파랗게 다시 빨갛게 파랗게 번갈아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새근새근 잠이 든다. 오늘 만나 술 마신 그 사람의 어떤 말도 생각나지 않고 두팔과 다리를 쭈욱 뻗어 비틀며 이불에 응석을 부린다. 거실의 불을 끈다. 깜깜하다.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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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 <커피프린스 1호점>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