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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새로운, 그러나 불온하지 않은

이제 시는 완벽하게 자본주의의 바깥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예술장르가 된 것 같다. 시의 시대라고 불리는 80년대에도 시인들은 시를 써서 먹고살지 못했고, 시의 위기라는 90년대에도 그랬다. 2000년대에는 사정이 더 악화되었다. 그래도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초판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팔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문예진흥원에서 선정된 우수도서 외에는) 재판을 찍는 시집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긴 어느 시대의 시인이 시를 써서 잘 먹고 잘산 적이 있었는가 생각해보면 그리 새삼스러울 일도 없다. 시는 항상 생활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처럼 시는 항상 그 시대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시의 시대였던 80년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것은 우리 문학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제도로 타락해버렸다는 데 있다. 시의 시대였던 80년대는 당시의 정치적인 불행이 우리의 감수성을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시는 그 예민한 촉수로 이 불우했던 한 시절을 가장 적확하게 포획해나갔다. 그때 우리는 가난했지만 돈이 생기면 시집을 사서 읽었고, 연인이나 친한 친구들에게 시집을 선물했다. 시를 통해 시대를 같이 공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90년대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적이 사라졌다’는 말로 한 시대의 종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시 역시 이 사라진 적의 ‘사라짐’에 대해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그것은 두 가지 의심이었다. 하나는 ‘정말 사라졌는가?’였고, 또 하나는 ‘그렇지 않다면 어디에 있는가?’였다. 그 결과 90년대의 시는 시의 화살을 자본주의의 현실에 돌렸다. 풍자와 야유, 독설과 장광설, 요설을 통해 90년대 시는 파격을 이루면서까지 자본주의의 현실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다. 그 결과 그들은 우리 시사에서 최초로 버림받았고, 장엄하게 전사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바로 자본주의의 자식들이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시에 있어서 정치적인 프리미엄이 완전히 걷히면서 IMF가 왔고, 새로운 밀레니엄이 찾아왔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현실에 아무 거부감이 없고,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새로운 세대들이 등장했다. 당연히 새롭게 나타난 시인들은 그중 하나였다. 그들에게 시는 무기가 아니었고, 정치적인 구호는 더더욱 아니었다. 90년대 시인들이 자본주의의 자식이면서 아버지를 미워했다면 이들은 아버지를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유산을 고스란히 상속받은 막내였다. 마침 각 대학에 문예창작학과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이들은 그 제도 속으로 편입되었고, 거기서 시를 제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 결과 언어를 색의 대비처럼 어울림의 관계로 구사하는 전대미문의 시가 나타났다. 이 새로운 시인들은 언어를 팔레트에 미리 짜둔 물감처럼 준비했다가 적재적소에 사용하며, 기가 막히게도 똑 떨어진 시를 만들어낸다. 이들은 새로운 언어를 사용한다기보다 언어를 새롭게 사용하고 있다. 이것 역시 분명 새로움이다. 그러나 전혀 불온하지 않다. 새롭지만 불온하지 않은 새로운 세대가 나타난 것이다.

그동안 우리 시단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결국 이 살벌한 자본주의의 시대에, 자본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한 덕분에 거꾸로 우리 시는 스스로의 내면을 더욱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역설을 건져낸 것도 사실이다. 이 내면에 대한 탐구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대거 2000년대 중반을 수놓고 있다. 이들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며, 철저하게 자폐적이고, 철저하게 자의적인 글쓰기로, 역설적이게도 이 천박한 자본주의의 단면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역사에 있어서도 자유롭고, 정치적으로도 자유로운 이 시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지, 이들은 그런 방법을 통해서 이 시대를 증거하고 있다고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는 불온해야 한다. 불온하지 않은 시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시가 안 읽히는 이유는 우리 시가 불온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불온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더이상 제도와 규범적 삶에 흠집을 내지 못한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받은 이유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주류사회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테네의 제도와 아테네인들의 규범적 삶을 흔들어놓았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음을 택했다. 그렇듯이 제도와 규범적 삶에 흠집을 내지 못하는 시는 일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시는 단순한 공감만을 이끌어내서도, 그저 아름답기만 해서도 안 된다. 시는 어떤 누군가를 두려움에 떨게 해야 한다. 시가 불온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