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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외로운 그녀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러브 액츄얼리>에서 쓸쓸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던 그녀들을 생각하다

<러브 액츄얼리>를 처음 보았던 겨울을 가끔 생각하곤 한다. 직장을 다니는 지금처럼 여유롭게 영화표를 지를 수 없었던 나는, 돈 대신 시간이라도 한정없이 가진 대학생도 아니었고 많이 가진 것이라고는 그냥 주책과 열성과 부지런함뿐이었다. 그래서 보고 싶은 영화가 생기면 겨울을 대비해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동전을 모았다. 그런 다람쥐 같은 부지런함은 끝내 나를 대학 졸업시키고 먹고살게 했고 그 당시에는 귀여운 애인을 갖게 했던 힘이었다. 내가 가진 주책과 열성과 부지런함을 총동원해서 차지했던 두살 어린 애인은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북적거리는 크리스마스 당일, 매진된 <러브 액츄얼리>의 표를 두장 구해왔고 둘 다 어렸던 우리는 소박한 기쁨에 들떠 앞으로도 이러한, 겨울철 생굴처럼 탱글탱글하고 달달한 행복이 앞으로의 인생에도 계속 지속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정말로 그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행복이 내 것이 될 거라고 의심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나는 물론 어리고 깜찍한 애인과 헤어졌고, 그 이후로도 몇번의 연애를 하고 몇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냈지만 더이상 다람쥐처럼 부지런하고 순진하고 잘 속아넘어가는 여자애는 될 수 없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영화뿐이었다. 영화 속의 사랑은 영원하고 연인들을 늙지 않은 채 영원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매년 계절이 되면 시즌 영화의 고전이 되어버린 <러브 액츄얼리>를 보면서, 처음 그 영화를 보았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여자들을 본다.

의외로 <러브 액츄얼리>의 러브는, 보호자를 갖지 못한 독신 여성에게는 상당히 차갑다. 변변한 직업도 없고 자기 자신에 대한 무모한 확신만 가진 채 미국에만 가면 내가 완전 먹어줄 거라며 무작정 비행기에 몸을 싣는 콜린은 정말로 알몸의 쭉빵녀들에게 둘러싸여 황홀한 밤을 보내고, 전리품처럼 한명을 영국으로 데리고 돌아올 뿐 아니라 자신을 의심했던 친구 몫의 아름다운 여자 역시 잊지 않고 챙겨오는 반면, <러브 액츄얼리>의 신은 독신남에게만큼 독신녀에게 너그럽지 않다. 결국 이 영화에서 홀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여성은 단 두명인데, 그중 한명인 미아는 팜므 파탈의 전형처럼 깊은 아이홀과 가녀린 몸매를 지녔으며 상사 해리를 단숨에 자빠뜨려 그의 가정을 순식간에 파괴해버릴 것처럼 유혹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사실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 둘이 육체관계를 가진 사실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카렌은 해리의 주머니에서 비싼 목걸이를 발견하고 기대감에 눈을 깜빡이지만, 정작 그녀의 선물꾸러미에서 나온 것은 목걸이에 비하면 하염없이 조잡해 보이는 CD뿐이다. 카렌이 해리에게 분노하는 것도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들키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바람을 피웠을 것이기에 분개하는 것이다. 그 시간에 미아는 그에게서 선물받은 비싼 목걸이를 걸어보며 집구석에 틀어박혀 크리스마스를 보낼 뿐, 자유분방한 독신녀에게 으레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밖으로 나가서 난잡한 올 나이트 파티를 하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다른 한명의 독신녀인 사라는 오랫동안 사랑해왔던 칼과 불타는 정사를 벌이려는 순간 번번이 발목을 잡는 오빠의 전화로 흐지부지되고 만다. 이후 그녀의 사랑은 도저히 잘될 것 같지 않다. 하려다 만 섹스는 남녀관계에서 굉장한 무안함을 낳고, 다 벗고도 거절당한 칼은 다시 그녀에게 기회를 줄 성싶지 않다. 이들 두 사람은 그대로 외로운 채 영화는 끝나버린다. 그리고, 간혹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연말 거리에 서서 행복한 사람들의 사랑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끝내 혼자 사는 방에 남은 두 여자를 떠올린다.

처음 <러브 액츄얼리>를 보았을 때 나는 아직 여자아이였고, 분명히 줄리엣이나 나탈리나 오렐리아 같은 크리스마스를 늘 맞게 될 거라고 기대했었지만 사실 그녀들은 보호자의 굳건한 질서 속에서 곱게 자라난 여성들이라 나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아직 몰랐었다. 그녀들은 모두 어릴 때부터 복작거리는 마을에서 대가족의 질서 안에 완벽하게 적응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사랑스러움을 잃지 않는 강인함을 배운 여성들이었다. 오히려 나는 진하게 칠한 마스카라로 관심있는 사람을 어딘가 불건강하게 힐끔거리는 미아라든가 사랑하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사무실에 늦게 남아 있는 것으로밖에 마음을 말하지 못하는 사라 같은 여자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이 계절만큼은, 사라와 미아들에게도 메리 크리스마스. 밝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버린 마음속의 여자아이들에게도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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