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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하나 그리고 둘> -배삼식
2007-12-28

그 침묵 속에 다시 있고 싶다

그는 말수가 적었다. 살가운 사람도 아니었다. 내가 그와 함께했던, 얼마 안 되는 시간은 거의 침묵으로 채워져 있다. 내 삶이 막 시작되려 할 때 그의 삶은 이미 저물고 있었다. 우리 사이는 너무 멀었고 나는 그의 침묵이 두려웠다. 그를 닮아서 나 또한 살가운 녀석은 못 되었던 게다. 감히 눈을 맞추지는 못하고 늘 언저리만 빙빙 돌며 그의 먼 눈길을 흘끔거리는 동안 그는 내 곁에서 떠났다. 그의 손때로 반질반질하게 빛나던 연장들이 녹슨 채 버려져 뒹굴다 하나둘 사라졌다. 그가 지었던 집도 어느덧 쇠락하여 사람이 깃들 수 없는 폐허가 되었다. 애지중지하던 꽃나무들도, 뒤란 대숲도, 탱자나무 울타리도, 그가 남긴 흔적들은 서서히 지워져갔다. 그리고 그 아득한 눈길만 남았다. 어디에 가닿는지 알 수 없었던 그 눈길.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을 보면서 내가 결코 알지 못했던 나의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이 영화는 지나가버렸거나 잃어버렸거나 가질 수 없거나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물음들로 가득 차 있다. 뇌출혈로 의식을 잃은 할머니. 가족들은 이 아득한 부재와 무의미를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다시 돌아오라고 무엇이 잘못된 거냐고 지나간 사랑에게, 시작도 되기 전에 어그러진 사랑에게 묻는다. 이 물음들의 반대편에 쌓이는 것은 답이 아니라 침묵이다. 당연한 것이 그것들은 애초에 답이 없는 물음들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가히 침묵의 향연이라 할 만하다. 영화는 섣불리 답을 들이대는 대신 때론 절망스럽고 어이없으며 때론 스산하고 황망한, 침묵의 다양한 결들을 쌓아올린다. 그 침묵들을 가로질러가며 사람들이 이 부재와 침묵을 받아들이고 감당해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릴 뿐이다. 어떻게? 역시 겪어보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어머니는 산에서, 아버지는 지나간 시간 속에서, 딸은 알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아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붙잡으려 헤매다 지쳐 돌아온다. 할머니의 죽음, 그 확실한 부재와 침묵이 이제 다사롭고 평온한 것은 자의든 타의든 그들 모두가 스스로의 부재를 경험하고 돌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죽은 할머니 앞에서 손자 녀석이 편지를 읽는 것으로 끝이 난다. 나 또한 할아버지가 떠난 뒤에야 그분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가닿지 못할 말들이다. 그분에게서 무슨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아마 나는 그분과 함께했던 그 침묵 속에 다시 있고 싶었던 모양이다. 글쓰는 일을 포함해서 내가 하는 모든 짓거리들은 결국 그 침묵의 순간을 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뭐라 말할 수도 없고 알 수 없어서 그 순간은 영원에 가깝다. 나는 그 아득한 눈길에서 영영 놓여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무슨 조화 속일까. 그렇게 멀고 어렵기만 하던 그가 이 세상 누구보다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말 안 해도 내 마음을 알아줄 이는 아마 그뿐이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느 여름날 오후, 할아버지와 나는 마루턱에 나란히 앉아 비가 촐촐 내리는 마당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기억은 그 영상을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다. 영화 속에서, 잠에서 깬 손녀가 할머니가 접어준 종이나비를 여전히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나는 따사롭고 평온한 정적 속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와 나의 뒷모습을 본다. 무얼 보고 있는 걸까? 어쨌든 둘 다 골똘한 듯도 하고 멍한 듯도 한 것이 우린 서로 많이 닮았다. 우리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공연히 난감한 눈길을 서로 들이대거나 객쩍은 소리를 해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손아귀에 종이나비 한 마리씩을, 부서지기 쉬운 침묵을 조심스레 쥐고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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