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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흥부의 박

판소리 <흥부가>에 보면 흥부가 박을 타는 장면이 나온다. 슬금슬금 톱질하면 박 속에서 온갖 보화가 쏟아진다는 것인데, 박 속에서 쏟아지는 내용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인간들이 품고 있는 기본적인 욕망의 구조를 눈치챌 수 있어서 흥미롭다.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우연히 제비가 물어다준 박씨로 횡재를 한 흥부에게 박에서 차례차례 나오는 재물들은 그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들의 순위 매김이라 봐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다면 피죽도 못 먹는 흥부에게 가장 절실한 욕망은 뭘까? 당연히 밥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을 것이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흥부가>에서는 죽는 사람 혼을 돌아오게 하는 환혼주, 소경이 먹으면 눈이 밝아지는 개안주, 벙어리가 먹으면 말 잘하는 개언초, 귀 막힌 이 먹으면 귀 열리는 개이용, 아니 죽는 불사약, 아니 늙는 불로초 등 약초가 먼저 나온다. 이어서 밥과 고기가 나오고 첫 번째 박은 끝난다. 그리고 두 번째 타는 박에서는 비단, 금패, 호박, 산호, 진주, 유리, 고래수염과 같은 요즘 말로 하면 명품들이라 할 만한 것들이 쏟아지고, 세 번째 박에서는 드디어 미녀와 하인들이 나오면서 그들이 마지막으로 대궐 같은 집을 지으면서 <박타령>은 끝난다.

거꾸로 살펴보면, 세 번째 박에서 나온 선물, 즉 집이 없어도 사람은 산다. 두 번째 박에서 나온 선물, 즉 명품들을 갖추지 않아도 사람이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그러나 첫 번째 박에서 나온 선물인 밥을 먹지 못하면 사람은 살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까 첫 번째 박에서 나온 선물들은 모두 생존과 관계된 것들이거나 삶의 질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품목들뿐이다. 생활하는 데 불편을 주는 장애를 치료하는 약물이거나, 죽음과 같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보고자 하는 약물들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이 첫 번째 박에서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극복해보려는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 같이 인간의 욕망은 반드시 인간의 한계에서 도출된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은 두 번째, 세 번째 박에서 나오는 비싼 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당연한 욕망들과는 크게 구별된다. 그런 당연한 욕망을 우리는 욕구라고 부른다. 좋은 만년필을 얻으면 좋은 종이를 갖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좋은 칼을 얻으면 거기에 걸맞은 칼집을 원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인간의 심사다. 그것이 본능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욕망과 본능을 혼돈해서 사용하고 있다. 욕망은 본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계 앞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욕망은 그 한계를 극복해보려는 적극적인 의지다. 흥보의 첫 번째 박은 욕망의 박이다. 어떤 극악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인간임을 잊지 않고,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일 때 우리는 다시는 광주와 같은, 아우슈비츠와 같은,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짐승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인간과 짐승이 가장 크게 다른 점이 뭐냐고 물으면 인간에겐 욕망과 욕구가 같이 존재하지만 짐승에게는 욕구만 있다는 것이 가장 다르다고 얘기한다. 인간이 때로는 (짐승보다 더한) 짐승으로 변할 수 있는 것도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놓아버리고 순수한 욕구의 문제만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게 될 때이다. 생로병사의 굴레를 인식하면서 끝없이 그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친한 병처럼 알고 욕망을 자연스럽게 풀어놓을 때 자본주의는 자본의 가치에서 인간의 가치로 옮겨질 수 있을 것이다.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를 욕구의 부추김으로 읽을 때 우리는 자본의 노예가 되지만 욕망의 문제를 잊지 않을 때는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욕구를 위한 축복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욕구가 그대로 욕망으로 넘어올 때 한 사회는 위기에 처한다. 요즘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얘기가 시장에 팽배하다. 이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얘기가 우리 경제가 원활히 계속해서 잘 돌아가야 한다는 당위에서 나오는 얘기인가, 아니면 좀더 잘살아야 되겠다는 얘기인가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경제가 원활히 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몸에 피가 잘 돌아가야만 탈이 나지 않는 것과 같이 당연한 얘기지만, 좀더 잘살아야겠다는 말에는 욕구가 욕망으로 넘어오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더 먹고 싶은 욕구가, 더 비싼 집에서 살고 싶은 욕구가, 욕망처럼 끝간 데가 없이 치달을 때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하고 만다. 보통 욕구는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해소된다. 그러나 욕망은 해소되는 법이 없다. 배고플 때 먹고 싶은 것은 욕구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을 먹고 싶은 것은 욕망이다. 우리의 욕망을 좀더 긍정적으로 옮겨놓을 수는 없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