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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하는 것보다 들키는 게 더 나빠!

<뜨거운 것이 좋아>의 아미 캐릭터를 보면서 바람의 윤리를 생각하다

<뜨거운 것이 좋아>의 아미는 사랑스럽고 또 귀엽기 그지없었다. 자타 공인의 패셔니스타 김민희가 걸쳐야 마땅한 화려한 의상과 메이크업을 지우고 추리닝이며 꽃핀에 청바지 차림으로 있어도 워낙 옷발 잘 받는 소녀스러운 몸이 어디 가지 않으니 아직 입봉 못한 20대 후반의 골초 여자 시나리오작가를 아무리 친척이라지만 회계사와 선보여준다는 설정도 믿을 만했다. 덧붙이자면 김민희의 사랑스러움 말고도 아마 아미는 좋은 대학 나왔을 가능성이 크지만, 어쨌거나 골초에 주정뱅이건 뭐건 저렇게 귀여운데 반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 게다가 그녀는 착하기까지 하다. 제대로 돈 벌지도 않고 심지어 돈 꿔가고도 미안해하지도 않고 동거나 결혼을 청하는 그녀의 말에 코웃음이나 치고 형들과 사는 그 알량한 독립 공간에 여자애까지 끌어들여 계집질까지도 하는데도 당장 사달을 내긴커녕 길에서 마주쳤을 때 택시비까지 쥐어주고 나중에 그 남자와 도로 자주기까지 하다니 착취가 생활화된 게 아니라면 아아 정말 너무 착하구나 싶었다. 내 남자의 방에서 라면을 먹는 반라의 여자를 발견했다면 아마도 나는 뭐든 쉬엄쉬엄 하지 못하는 성격답게 바로 주방으로 돌진해 식칼을 붙들었거나 놀라서 떨어뜨려 찰카닥 깨져버린 와인병의 모서리를 이왕 못 마시게 된 거, 하면서 아주 유용히 사용하고야 말았을 것이 뻔하다.

게다가 꼴에 페미니스트랍시고 우리 오빠는 비둘기처럼 순결한데 저 망할 계집애가 여우처럼 꼬리를 친 게 분명하다 뭐 이런 주장을 하면서 여자끼리 머리채 잡는 일은 차마 못하니 남자친구만 마냥 조질 수밖에, 십중팔구 식칼이든 깨진 와인 병이든 그 뾰족한 끝을 몸소 체험한 불행한 인물은 그가 되었을 것이고 뒤이어 당연지사로 따라올 범죄신고112, 긴급구호119, 진술, 소송, 합의, 뭐 이런 아름답지 않은 단어들을 생각하니 특별히 박복하지도 각별히 유복하지도 않았던 이십 몇년의 인생 동안 남자가 바람 피운 꼴 본 적이 없는 것이 갑자기 더없는 행운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뜨겁다 못해 고장난 보일러처럼 펄펄 끓어오르는 못된 성정의 나와 달리 착한 아미가 갑자기 안 착하게 보인 것은 착하고 재미없는 회계사 남자친구에게 나 자기와 만나는 동안 다른 남자랑 잤어, 하고 불어버린 그 순간이었다. 연애에도 룰이 있다. 이 룰에 의거하여, 그것은 절대로 말하면 안 되는 종류의 일이다. 양다리를 걸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연애에서의 윤리 같은 것은 포기한다, 막나가버리겠다, 꼴리는 대로 다 저질러버리겠다 뭐 그런 의미이긴 하지만 그게 그토록 막나가는 짓이기 때문에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마지막 윤리가 있다. 죽어도 지켜야 할 마지노선이 있다. 그것은 바람 피운 죄책감만은 일 저지른 놈이 오롯이 다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대로 나불나불 불어버리면 마음이야 편하다. 누구나 나쁜 짓을 하고 나면 다 털어놓고 용서받고 싶은 법이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된다. 거짓말을 하고 몰래 놀아나면 마음속에 무거운 추 하나가 어딜 가고 무얼 하든 묵직하게 가라앉아 내내 마음을 괴롭히지만 뱃속에 가라앉은 그 추가 주는 언짢음과 꺼림칙함이야말로 일 저지른 놈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죄이고 벌이다. 바람 피우는 것도 나쁘지만 그 꺼림칙함에서 놓여나고 싶다고 해서 술술 불어버리면 그게 진짜 막장이다. 재미도 보고 맘도 가벼울 순 없으며 바람 피우는 것보다 들키는 게 더 나쁘고 들키는 것보다 선수쳐서 사실대로 불어버리는 게 더 나쁘다. 죄책감의 지옥에 혼자 빠져 있어야 하는 것이 바람 피운 대가다. 상대에게 말해버리면 그 혹은 그녀는 두배, 세배의 지옥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일차로 믿었던 사랑에 대한 충격, 이차로 내가 그렇게 부족했는가 하는 자책과 한탄. 정말 사랑했다면 바람은 피웠을지언정 그 기분에서만은 막아주는 게 최후의 윤리일 터 들키지 않거나 혹은 끝까지 거짓말하거나, 그것만은 사수해야 한다. 물론 완전 선수라면 이런 시시한 죄책감의 무게추 따위를 애당초 뱃속에 키우지도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보통 여자에 불과한 나는 장차 내게 몇번의 연애가 남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장면을 보면서 미래의 연인에게 마음속으로 애걸복걸했다. 자기, 차라리 나를 때리고 나를 미워해줘, 바람 피우지는 마라. 아니 뭐 그럴 수 있다 쳐, 그래도 당신의 온 재주와 두뇌를 동원해서 제발 들키지 마라, 응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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