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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성장소설 <크.레.이.지>

바람 잘 날 없는 다둥이 가족, 그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퀴어 소년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또 아무리 많이 배워도 그 안에만 들어가면 성숙한 자아를 발현하거나 지적인 합리성을 적용하기 힘들어지는 집단이 있다. 그게 바로 가족이다. 가족은 때로는 험난한 세상을 뚫고 나가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귀를 간질이는 세이렌의 노래처럼 우리를 엉뚱한 곳에 주저앉히거나 좌초시키기도 한다. 안주하고 싶음과 벗어나고 싶음이라는 상반된 두개의 욕망을 잘 조절하고 자신을 세워나가는 것, 그것이 가족을 가진 이들이 풀어야 할 영원한 숙제이자 성공적으로 하나의 개체로 독립해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퀘벡영화 <크.레.이.지>는 요란한 음악과 패셔너블한 외장 아래 가족에 관한 잔잔하고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다.

1960년 크리스마스이브 세명의 아들과 단란한 저녁시간을 보내던 부부 사이에 새로운 아들이 태어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부부는 아기 예수와 생일이 같은 자크의 탄생을 축복으로 받아들이지만, 꼬마 자크에게 생일은 지루한 자정미사 끝에 수많은 친지들의 키스 세례 그리고 원치 않는 장난감 선물을 받는 날일 뿐이다. 넷째아들이 자신의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아 멋진 남성으로 자라줄 것이라 믿었던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자크는 게임 세트나 드럼보다는 장난감 유모차를 받고 싶어하는 독특한 취향의 소년으로 자란다. 먹보막내 이반의 탄생과 더불어 자크의 가족은 지적인 크리스티앙(막심 브렘블레), 건달 같은 레이몽(피에르 뤽 브리양), 스포츠맨 앙트완(알렉스 그라벨)과 자크(마크 앙드레 그롱당) 그리고 부모인 제르베(미셸 코테)와 로리안느(다니엘 프룰)까지 일곱이 된다. 형제들은 때로는 힘이 되고, 때로는 원수가 되면서 소년에서 청년이 되고 부모는 그들이 자신의 울타리에서 분리해나가는 과정을 때로는 뿌듯하게, 때로는 가슴 아프게 지켜본다.

<크.레.이.지>에는 대가족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엄청난 디테일을 자랑하며 포진해 있다. 생활에서 우러나온 관찰력을 바탕으로 한 신선한 접근, 이것이 이 작품이 가진 최대의 미덕인데 이로 인해 여타의 가족영화들과 다른 자리에 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덕분에 진행이 다소 느슨해져 ‘퀴어’라는 소재가 담보해줄 극적인 구성과 ‘가족’이라는 단어가 환기할 짠한 감동을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다소 지루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지난한 과정들이 감독인 장 마크 발레와 그의 죽마고우이자 공동 각본가인 프랑수아 불레의 자전적인 경험이 녹아들어 있는 인물인 자크를 그 누구보다도 현실적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아가는 인물로 탄생시키는 탄탄한 배경 역할을 한다.

소년이 가족 안에서 자신의 퀴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판타지적 요소와 결합하여 다뤘다는 점에서 알랭 벨라이너 감독의 <나의 장밋빛 인생>과 유사한 점이 있는데 그 작품이 퀴어 동화였다면 이 작품은 퀴어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퀴어영화에서 일찍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 주인공이 그로 인해 핍박받는 과정이 그려지는 것에 반해 <크.레.이.지>에서 주인공 자크의 정체성은 계속 의문형이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여자친구가 있지만 그녀의 육체가 그다지 탐나지는 않고, 그것의 원인이 예쁜 사촌 때문인 줄 알았더니, 오히려 사촌의 남자친구를 봤을 때 더 마음이 설렌다. 게다가 분명 남성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지만 게이가 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으니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규정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던 발레 감독은 그의 번민과 방황을 예수님의 그것과 동일선상에 놓는다. 자크로 하여금 성지순례를 떠나게 하고 거기서 본연의 자아와 마주치도록 만든다.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대표적인 종교인 기독교적인 비유를 전복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소외된 자들의 편이었던 예수, 그의 고통이 자크의 몸과 영혼으로 전이된다.

감독은 자크의 순례에 대해 그가 오래전에 망가뜨린 아버지의 애장품 팻시 클라인의 앨범이라는 다소 유머러스한 응답과 계시를 마련함으로써 가족으로 귀환하는 그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준다. 이처럼 음악은 이 영화에서 빠져서는 안 될 요소이다. 감독은 자신의 수익을 줄여 음원사용료로 60만달러를 지불했을 정도로 영화음악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덕분에 음악감독을 맡은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뿐 아니라 팻시 클라인의 감미로운 목소리, 핑크 플로이드, 롤링스톤스의 록 사운드 등 주옥같은 선율이 영화 전반에 흘러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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