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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종에 갇힌 남자 <잠수종과 나비>
김도훈 2008-02-13

전신마비의 잠수종에 갇힌 남자. 왼쪽 눈꺼풀로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하다

이건 실화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잠수종과 나비>를 보고 눈물 흘릴 준비가 된 관객도 있을 게다. 프랑스 패션지 <엘르>의 편집장 장 도미니크 보비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은 1995년 12월8일 금요일 오후였다. 20일 뒤 장 도미니크는 눈을 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왼쪽 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신체에서 움직이는 부위는 오직 왼쪽 눈꺼풀뿐이었다. 장 도미니크의 몸은 이미 무거운 잠수종에 갇힌 신세였다. 의식은 멀쩡하나 전신은 마비상태인 ‘록트인 신드롬’(Locked-In syndrome)이 찾아온 것이다. 파리 상류사회의 빛나는 나비였던 장 도미니크는 절망으로 몸부림치고 싶었지만 몸부림이라는 행위 역시 타인의 사치일 따름이었다. 그는 (거의) 죽었다.

하지만 장 도미니크는 절망 앞에서 쓰러져내릴 만큼 나약한 인간은 아니었다. 아니, 넘겨짚어보건대 그는 나약한 척 울부짖기에는 에고가 지나치게 강한 남자였다. 하긴 프랑스판 <엘르>의 편집장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자신의 간병인들이 얼마나 재치있고 현명하고 예술적인 남자의 배설물을 치우고 있는가를 어떻게든 알려야만 했을 것이다. 장 도미니크가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방법은 책을 쓰는 것이었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왼쪽 눈꺼풀밖에 없었기에 방법은 고통스러울 만큼 지루하고도 간단했다. 출판사 직원이 알파벳을 외우기 시작하면 자신이 원하는 단어에서 왼쪽 눈을 깜빡이는 것이다. 15개월 동안 20여만번 눈꺼풀을 깜빡거린 장 도미니크는 130페이지의 수기 <잠수복과 나비>를 1997년 3월에 출간해냈고, 책이 출간된 바로 그 주에 그는 (정말로) 죽었다.

<잠수종과 나비>가 전형적인 할리우드영화였다면 장 도미니크의 삶은 <씨 인사이드>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반씩 섞은 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양념을 살짝 끼얹은 평범한 멜로드라마로 탄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포 나잇 폴스>의 줄리앙 슈나벨은 전통적인 드라마투르기의 관습을 피해가며 아예 관객을 장 도미니크의 머릿속으로 던져버리는 길을 택했다. 슈나벨의 예술적 야심에 촬영감독 야누스 카민스키(<뮌헨> <쎄븐>)가 가세한 결과는 기겁할 만하다. 카메라는 (거의) 장 도미니크의 눈을 통해서만 모든 사물을 보여준다. 심지어 장 도미니크의 오른쪽 눈이 점점 꿰매지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순간에는 거의 <클로버필드>가 떠오를 정도다. <빌리지 보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건 이미지의 ‘난교’에 가깝다. “흐릿한 이미지, 명멸하는 노출, 일그러진 와이드 앵글과 익스트림 클로즈업의 시각적 난교.” 카민스키의 기교에 더해지는 또 다른 기교는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8월말 9월초>에서 예민한 프랑스 남자의 어떤 절정을 전해줬던 마티외 아말릭의 연기다. 그는 <오아시스>의 문소리보다도 더욱 제한된 육체적 자유를 부여받고 있지만, 최소한의 자유(오로지 눈꺼풀 하나!)만으로 장 도미니크의 고통과 비애를 스크린에 바른다. 이건 정말이지 본질적인 연기이거나 연기의 본질 그 자체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완벽하고 예술적으로 기교 넘치는 <잠수종과 나비>는 종종 지나치게 계산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슈나벨이 아말릭과 카민스키의 서커스에만 지나치게 심취해 있는 탓이다. 우리는 진정한 장 도미니크의 삶을 느끼는 것처럼 여기게 되지만 모든 것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슈나벨의 기술적 계산을 통해 보여지는 것일 따름이다. 장 도미니크 보비의 책은 일상의 삽화들로부터 뻗어나온 마음의 흔들림에 대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슈나벨은 원작의 일상적 삽화들을 60년대 아방가르드영화 같은 시적인 이미지들, 부서지는 빙산과 가라앉은 잠수종으로 완벽하게 대체하고픈 욕구를 도무지 참지 못한다(심지어 언어 치료사를 비롯한 영화의 모든 여자들도 하나같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그 이미지들은 꿈을 꾸듯 아름답지만 장 도미니크의 세계라기보다는 슈나벨의 세계일 뿐이다.

책 <잠수복과 나비>의 마지막에 장 도미니크는 말한다. “열쇠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 잠수종을 열어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다른 곳에서 구해보아야겠다. 나는 그곳으로 간다.” 결국 인간 장 도미니크는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그러나 줄리앙 슈나벨의 장 도미니크가 날아올랐는지는 알 길이 없다. 오히려 슈나벨은 자신이 날아오르는 길을 택했다. 이카로스의 날개 같은 예술적 허영에 대한 대답은 칸영화제, 골든글로브의 감독상과 오스카 노미네이션의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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