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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봤어? 해봤어? 가봤어?

좋은 소설이나 충격적인 시를 읽으면 가슴이 멍해진다. 그 멍해진 감동을 추스르고 나면 마음속에는 단단한 무엇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가 이 이미지의 시대에 문학을 놓지 않고 있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만나 내가 읽었던 소설이나 시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감동을 나누고 싶어진다. 상대방이 그 글을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나는 내 마음속에 자리잡은 단단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어 있으므로 아무 상관없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너와 나는 이미 그 소설을 떠나 하나의 담론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담론의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때는 논쟁이 되기도 한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이 충돌하여 이야기를 격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지에 대한 얘기를 할 때면 양상은 조금 달라진다. ‘너 그 영화 봤어?’라고 물었을 때 상대방의 대답이, ‘아니’라면 ‘꼭 봐. 죽여’ 하고 끝나고 만다. ‘응, 봤어’라는 대답이 나올 때에야 이야기가 진행된다.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과 본 사람은 대화가 되질 않는다. 그래서 예전에는 동네에 이야기꾼이 한명씩 꼭 있었다. 지금처럼 영화 관람이 손쉽지 않았던 시절에 영화를 보고 온 사람은 영화를 못 본 사람에게 장황하게 영화의 줄거리를 구술하곤 했다. 다행히 영화를 본 사람이 특출한 이야기꾼이면 영화를 못 본 사람들은 이야기꾼의 말재주에 홀딱 넘어가 마치 영화가 눈앞에서 상영되는 것 같은 재미에 흠뻑 빠지기도 했다. 요즘처럼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 이야기꾼이 주는 재미는 거의 사라졌다. 모든 게 봤어, 안 봤어, 로 이야기가 일도양단된다. 그렇다고 한편의 영화가 주는 감동이 문학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문학이 마음속에 단단한 무엇이 자리잡게 해준다면 영화는 우리의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쓰다듬고 간다. “미디어는 마사지다”(맥루한)라는 말이 있지만, 그래서 이미지는 마사지다. 이미지는 우리의 마음에 강하게 접사된다. 그리고 다양한 취양에 대해 언제나 열려 있다. 한 배우의 사소한 동작 하나를 두고도 의견이 분분하다. 멋지다느니, 느끼했다느니, 제각각이다. 비단 영화뿐만이 아니다. 이미지는 자기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단단한 무엇에 대한 얘기와 달리 분명한 대상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봤어?’, ‘해봤어?’, ‘가봤어?’ 하는 물음이 중요해진다. 보지 못해도, 해보지 않았어도, 가보지 않았어도 할 수 있는 그런 얘기가 아니다. 이 세 가지 종류의 물음에 대해 보지 못하고, 해보지 못하고, 가보지 못한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든가 일방적으로 들어야 한다. 이미지의 시대에 소통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은 그래서 일방통행적인 방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미지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서두에 붙는 이러한 질문들은 어느 정도 폭력성을 띠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그야말로 우리는 지금 이미지에 피폭당하고 있다라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 ‘-봤어?’식 질문이 요즘 정치판에서도 이슈가 되는 모양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가장 자주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가봤어?’라는 말이라고 한다. 현장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설 기업인 출신다운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가봤어?’라는 질문에는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안 가본 사람들은 모두 배제하겠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안 가본 사람들은 말도 꺼내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는 청계천에 가보고, 청계천을 이상한 어항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번엔 낙동강에 가보고, 경부운하 건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거기에 반대하는 여론들을 두고 만약 그가 ‘가봤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대화를 그만두고 당신들은 그냥 앉아서 굿이나 보고 (가본 자신이 만들어내는) 떡이나 얻어먹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가보지 않은 모든 곳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가 가보지 않은 곳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벌써부터 인수위에서 발표한 교육정책이 흔들리고 있다. 가보지 못해서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닐 것이다. 가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세히 이야기해주는 이야기꾼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고 나서 이야기꾼은 이제, 듣고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거꾸로 들어야 한다. ‘-봤어’식의 물음에는 언제나 못 보고, 못해보고, 못 가본 사람들에 대한 나눔의 배려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진지한 이야기꾼이 되어 토론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결과보다 항상 더 값진 것은 그런 대화와 토론의 과정에서 건져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