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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킬링 필드> -나현 시나리오 작가
2008-03-07

그 뜨거운 진실이 나를 울게 해

얼마 전 대형마트 매장을 거닐다 매대에 수북이 쌓여 있는 DVD타이틀 더미에서 반가운 작품을 하나 발견했다. 홍금보 주연의 <삼덕화상과 용미육>. 할인초특가 6900원. 아무리 헐값이라지만 사다놓으면 한 번 제대로 보기나 할까 고민하던 끝에 결국 구입을 했다. 극장 개봉명 <중원호객>. 내가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로 기억되는 작품이기에 웬만하면 소장해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최초로 접한 영화가 이렇다보니 그 이후로도 홍콩 무술영화에 대한 탐닉은 계속되었고 그러다 간혹 <원권> <복권> <무림걸식도사> 따위의 국산 무술영화에 낚이는 실수도 범했지만 그럴수록 홍콩영화에 대한 동경과 확신은 날로 확고해져갔다. 암전의 화면에서 골든하베스트의 각진 ‘G’ 로고가 뜰 때면 예의 그 쿵쾅거리는 사운드에 맞춰 내 심장도 요동을 쳤고 그런 증세는 요즘도 약간 남아 있다. 정말 그랬다. 영화 하면 홍콩영화였고 그들이 보여주었던 경쾌함과 재기발랄의 에너지는 영화가 전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이라 믿었다. 적어도 <킬링필드>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땐 개봉관이라 하더라도 상영 회차니 좌석번호니 따지는 사람도 지키는 사람도 없었으니 그저 표를 끊었으면 무조건 영화가 상영되는 중에 무작정 들어가 중간부터 보고선 다음 회차에 이어서 보던 게 일반적인 관람패턴 아니었던가. 그러다보면 뜨거운 키스장면을 맞닥뜨리고는 어둠 속에서 괜히 혼자 민망해하거나 현란한 액션장면에서 넋을 잃은 채 좌석에 앉는 것도 깜빡하던 일이 다반사였다. 그날도 그랬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 모처럼 주신 초대권에 들뜬 중3의 나는 무슨 내용의 영화인지도 모른 채 한창 상영 중인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스크린엔 진초록의 밀림이 펼쳐져 있고 극장 안엔 비행기 굉음이 터질 듯 들려왔다. 밀짚모자를 쓴 초라한 행색의 주인공인 듯한 사내는 일행 몇몇과 밀림을 헤매며 어딘가로 탈출을 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관객의 숨죽인 표정과 묘한 열기, 영화 <킬링필드>는 클라이맥스로 이제 막 치닫고 있는 중이었던 거다. 중간에 들어온 나로선 도무지 내용을 알 수도 없었음에도 그 순간 출처불명의 이상한 감정이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가까스로 국경을 넘은 주인공은 마침내 헤어졌던 동료와 재회하고 감격의 포옹과 함께 영화는 끝났다. 관객은 하나같이 먹먹한 표정으로 숙연함을 연출했다. 영화라면 마땅히 주어야 할 청량한 여운도 없었다. 당시 홍콩 마니아였던 난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뒤 다시 시작된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나 역시 앞서 자리를 뜬 관객과 똑같이 어쩌면 더 과장되게 먹먹한 표정을 지었는지도 모른다. 영화가 이럴 수도 있구나. 영화가 내 마음을 이상하게 흔드는구나. 그것은 ‘감동’이었다. 열다섯 소년이 그때까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킬링필드>는 베트남전이 끝날 즈음의 인접국 캄보디아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론롤 정권의 부패, 크메르루주의 봉기와 공산화, 그리고 미국의 이기주의…. 지금 생각하면 중3이 이해하기엔 버거운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어린 내가 기꺼이 감동할 수 있었던 건 인간애에 관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좀더 진실에 가까이 접근하려 애쓰는 미국인 기자, 그리고 그를 끝까지 도우려는 현지 통역인. 전쟁의 포화 속에서, 죽음의 들판 위에서 그 두 주인공이 보여준 사랑과 우정, 그리고 삶에의 의지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소년이 보기에도 지극히 진실되고 순정했다. 그때까지 동경해 마지않던 영화들에선 느끼지 못했던 감동이 꽤 진하게 새겨져 오랫동안 지속됐다. 요즘같이 각박하고 살벌한 세상에 무슨 사랑이니 우정 타령이냐 타박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각박했다. 어느 시절이고 힘들지 않은 때는 없었으며 그렇다고 삶의 가치가 변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런 만큼 진실된 삶의 가치를 소중하게 지키려는 시드니와 프란의 이야기는 여전히 빛을 잃지 않을 거라 믿는다.

어쨌거나 얼마 뒤 <킬링필드>는 반공영화로 포장되어 단체관람이 독려되었고 그 덕에 나는 뭉클했던 감동을 한번 더 느낄 기회를 가졌다. 프랑스대사관에서 가슴 아픈 이별을 하는 시드니와 프란의 눈물을 뒤로한 채 극장의 어둠을 빌려 짤짤이를 하거나 장난을 치는 녀석들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그렇게 중3의 나는 훌쩍 성장했던 것 같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영화를 업으로 삼고 있지만 가끔씩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작품이 미래의 관객에게 어떤 소용으로 남게 될까’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고민의 끝에는 항상 그 시절 영화 상영 중 불쑥 들어가 보았던 캄보디아의 눈부신 초록의 밀림을 떠올린다. 중3 소년의 마음을 흔들었던 그 영화처럼 내가 쓴 작품도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다. 상영 중 팻말이 걸린 채 굳게 닫힌 극장 문을 보면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다. 저 속에선 또 어떤 감정들이 휘젓고 다니며 소통이 되고 있을까. 그럴 때면 무작정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어진다. 하긴 그랬다간 제복 입은 여직원들이 가만두질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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