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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락
2001-11-06

시사실/ 폴락

■ Story

불안한 정서를 지닌 가난한 화가 폴록(에드 해리스)은 새로운 예술적 경지를 개척해보겠다는 야심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어느날 그에게 여류 화가 리 크래스너(마르샤 게이 하든)가 찾아온다. 그녀는 폴록의 작품을 둘러보고는 단박에 그가 대단한 재능을 지닌 화가임을 알아보고 선뜻 그의 조력자가 될 것을 결심한다. 서서히 폴록의 그림은 화단에 알려지기 시작하고 리는 그에게 좀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해 시골로 이사할 것을 제안한다. 폴록은 작업 도중 바닥에 떨어진 물감 자국을 보고 새로운 표현기법에 대한 암시를 얻는다. 평론가들의 극찬과 함께 그는 미국 화단의 중심인물로 급부상하지만 어느 순간 자기 작품의 진정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 Review

퓰리처상을 수상한 전기 <잭슨 폴록: 미국의 신화>를 원작으로 한 <폴락>은, 예술가를 다룬 영화들이 흔히 그렇듯이 한 예술가의 생애와 예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몫에 낚아채고자 시도한다. 잡지 <라이프>에 실린 잭슨 폴록에 관한 기사- 1949년 8월8일치에 실린 기사로 그 제목은 ‘잭슨 폴록: 그는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미국 화가인가?’였다- 위에 사인을 부탁하는 한 부인의 손에 잠깐 머무르던 카메라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전시회장을 둘러보는 화가 잭슨 폴록의 얼굴로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리곤 성큼 세월을 거슬러 폴록이 아직 위대한 화가로 인정받기 전, 1941년의 뉴욕으로 향한다.

영화가 다시 위의 전시회장면으로 돌아오기까지 우리는 다소 심하다 싶게 요약, 정리된 잭슨 폴록의 생애와 마주하게 된다. 영화 <폴락>이 이 혼란스럽고 기이한 화가의 청년기를 껑충 건너뛰기로 결정하면서 그에 대한 완충장치로 마련해놓은 것은 바로 폴록의 아내 리 크래스너다. 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열광, 아트 스튜던트 리그 시절과 스승 로버트 하트 벤턴과의 만남, 멕시코 화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의 영향, 공산주의에의 동조, 그리고 초현실주의에 대한 관심 등으로 이어지는 폴록의 젊은 시절을 단 두 시간짜리 영화에 담아 넣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도였을 것이다.

따라서 리와 폴록이 영화 초반부에 나누는 대화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폴록의 과거를 짚고 넘어간 뒤에 본격적으로 폴록의 예술적 전성기에만 집착해보고자 한 것은 일단 옳은 선택이었다. 게다가 리는 폴록의 예술적 세계에 대한 해설자 역할까지 해내고 있다. 가령, 폴록의 그림 <남-여>(1942) 앞에서 그녀는 큐비즘, 자유연상, 자동기술법 등등의 용어를 죽 내뱉는데 이는 어느 정도 폴록이 거쳐온 예술적 도정을 설명해주고 있다(비록 리의 지적에 폴록이 내뱉는 말이란 고작 ‘그딴 건 당신이나 그려!’일 뿐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폴록의 예술적 수련과정과 영향관계가 충분히 묘사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가 바닥에 떨어진 물감 자국만을 보고 ‘드리핑’ 기법에 대한 암시를 얻었다고 주장하는 장면은 과장된 우스개로밖엔 안 보인다.

평론가 그린버그의 극찬과 이에 뒤따른 <라이프> 기사를 통해 잭슨 폴록이 일약 유명인사로 떠오른 뒤의 생애를 다룬 후반부에 가서야 영화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여기서 에드 해리스는 진정 예술의 의미, 혹은 가치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빠진다. 영화의 한 장면, 유리판 위에서 폴록은 예의 ‘액션 페인팅’(혹은 제스처 페인팅)을 시연하고 있다. 유리판 아래에서는 그의 작업모습을 담기 위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 흩뿌려진 물감들 사이로 폴록의 얼굴이 보인다. 어느 순간 폴록은 이미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신의 노력의 결과물들이 오히려 거대한 하나의 이미지- 재구성된 폴록 자신의 이미지- 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바로 그 이미지야말로 그의 작품이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음을 알아차린 순간 그는 절망감에 휩싸인다.

‘필름이 다 됐으니 그만 하자’는 촬영기사의 말은 카메라의 시선- 곧 대중의 시선- 이 그의 작품을 향한 것도, 그의 ‘액션’을 향한 것도 아니었으며 오직 작품 뒤에 숨은 허상을 향한 것이었음을 환하게 드러내 보인다(실제로 잭슨 폴록은 그의 괴벽에 힘입어(?) 예술가에 대한 ‘미국의 신화’를 만들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지금은 다소 식상해진 ‘줌 인-트랙 아웃’ 기법을 통해 찍혀진 장면은 폴록이 처한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풍경이 그를 압박해 들어오는 듯 보이면서도 일견 그가 풍경을 끌어당겨 그 속에 녹아들어 버리고자 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잠시 폴록이 명성을 얻기 시작한 시기를 돌이켜보면, 때는 바야흐로 의회반미활동위원회가 영화계의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해내기 위한 마녀사냥에 돌입하던 시기다. <폴락>에서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읽어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피터 월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가장 나쁜 것은 정치에 의한 예술의 조작과 국가주의가 성행하던 시기에 폴록이 미국회화의 왕관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린버그가 추구한 이데올로기적으로 순수한 예술이 오히려 제국주의적 선전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위대한 예술가의 이상하고도 비극적인 운명이었다.”(<미국회화의 승리: 불량한 러시아계 반항아>)

유운성/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개봉작> 폴락

▶ 실존 인물, 폴록과 그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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