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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어떤 집에서 살고 싶으세요?

건축 일을 한 십년 넘게 해오면서 느끼는 참, 이상한 일이 한 가지 있다. 건축설계 일이라는 게 크게 나누면 두 가지다. 하나는 주택 일이고 다른 하나는 주택 일이 아닌 것. 그중에 주택 일이 아닌 것에는 크고 작은 빌딩에서부터 시작해서 문화회관이나 구청신축과 같은 관과 연결된 일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일들은 주택 일보다 더 복잡한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실은 오류인지도 모르는) 일반해를 바탕으로 작업이 시작된다. 그런 일들의 해법은 대부분 도시라는 거대한 문맥 속에서 찾아지며 사용자에 대한 예측은 수치적으로 분석된다. 그러다 보니 불특정 다수에 대한 평균치가 생기고 그것이 계획 단계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기준이 분명하다는 얘기이고, 그런 일은 하면 할수록 이른바 데이터라는 것이 쌓이게 된다. 그래서 다음에 또 그와 비슷한 일이 들어오면 전에 했던 작업의 데이터가 새로운 일에 적용되어 처음 접했을 때보다 훨씬 수월하게 된다.

그에 반해 주택 일은 가족 구성원의 연령이나 성별 등이 명확해서 더 손쉬워 보이지만 의외의 변수가 더 복잡하게 얽혀 있다. 가족 구성원의 취향과 집을 이용하는 개성들이 천차만별인 까닭이다. 아버지의 요구가 다르고 어머니의 요구가 다르며 아들의 요구가 다르다. 여기서는 평균치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 어느 한 사람의 개성도 평균치에 묻혀서는 안 되는 것이 주택설계다. 그래서 주택 일은 훨씬 더 정교한 작업이 된다. 그 집이 놓이는 장소의 바람의 방향과 빛의 세기, 습도 등의 환경적 요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 구성원의 직업, 취미, 성격, 지금 사용하는 가구의 목록부터 앞으로 사용할 가구들, 심지어는 고부간의 갈등까지도 조심스럽게 조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상한 일은 여기서부터 생긴다. 사람이 자기 집을 짓는 기회는 사실, 평생에 딱 한번 있을까 말까하다. 그만큼 설계 사무실에 자기가 살 집을 의뢰하러 오는 분들은 많은 꿈을 가지고 오게 마련이다. 어느덧 사람들에게는 집을 짓는다는 것이 아주 낯선 행위가 되었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기 집을 갖는(짓는) 꿈을 꾸었다. 자기 집을 갖는 것은 어렵지만 그런 꿈을 꾸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일이고, 구체적이다. 그런데 이제 반백의 나이에 그 꿈을 이루려고 하는 대다수의 의뢰인들과 마주해 얘기하다보면 의외로 그가 자기가 살 집에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데 놀라게 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의뢰인들이 쏟아붓는 말의 양이다. 물론 모두 자기가 살 집에 대한 얘기들이다. 그러나 그 얘기들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얘기들은 자신이 살고 싶은 집 얘기가 아니라 다 남이 살고 있는 집 얘기뿐이다. 계단은 이렇게 해주세요, 지붕은 저렇게요, 꼭 외벽은 돌로 붙여주세요, 하면서 흡사 자신의 취향을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 가만히 따져보면 그런 취향들은 모두 매스미디어에 의해 훈련받은 유행이거나 상류사회가 지향하는 주류의 기호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 취향의 질을 따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좀더 중요한 것은, 여기저기 잡지에서 이런저런 건축정보들을 꼼꼼히 스크랩하고, 원하는 집의 분위기까지 모아온 그가 정작, 어떤 집에서 살기를 원하는지 나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분위기의 거실이나 샹들리에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간단한 집에서 살고 싶어요’나 ‘계단이 많은 집에서요’, ‘아주 밝은 집을 원합니다’와 같은 이런 정도의 생각이 그렇게 어려운 거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대답이 어려운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런 평범한 바람을 집과 그리고 건축과 연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찾아오는 의뢰인들의 지적 수준과도 아무런 상관없이 다 똑같다는 것도 놀랍다.

어느덧 우리는 우리의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런 현상은 더하다. 그들은 ‘최고급’ 자재를 원한다. 그런 집은 보여주기 위한 집이 분명하다. 자기의 꿈을 꾸지 못하고 남의 꿈을 꾸고 있다. 우리의 옛집을 보면 그런 아쉬움은 더 커진다. 자신의 지식이 자신의 집과 삶과 예술과 유리되지 않고 그대로 주욱 연결되는 조선 반가에 배여 있는 사상들이 오히려 경이로울 지경이다. 당연한 건데도 말이다. 하기는 성리학의 엘리트들이 건축주이자 건축가였으니 그랬다고는 해도 지금이라고 왜 그렇게 하지 못하겠는가? 자기가 살 집의 뼈대되는 생각은 자신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