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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라는 캐릭터를 활용한 메세지 전달 < GP506 >
이영진 2008-04-02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스포일러 있음.

“손에 피를 묻힌 자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알포인트>의 정글에서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은 이는 없었다. 실종된 동료들을 찾아 알포인트 수색에 나선 최태인 중위와 여덟명의 소대원들은 모두 길을 잃고 숨을 거둔다. “나 이 돈 가지고 엄마한테 가야 하는데. 우리 엄마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런데 조금 겁이 나요. 내가 너무 많이 변해버려서. 우리 엄마가 날 못 알아볼까봐. 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우리 집은 여기서 너무나 먼데….” 열여덟살 어린 병장만이 목숨을 부지하지만 고작 목숨뿐이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부상병 신세인 그는 너덜너덜한 목숨을 붙잡고 후방으로 후송됐을까. 땀과 피로 얼룩얼룩한 50만원으로 엄마에게 소를 사줬을까. 아니면 원혼의 밀림에서 스스로 죽음을 결행했을까. 알 수 없다. 하나 확실한 건 신음소리로 가득한 그 악몽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작 <알포인트>를 자동연상케 하는 공수창 감독의 <GP506>은 끔찍한 수렁이, 참혹한 미궁이 과거 딴 나라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 똬리를 틀고 있다고 말한다.

GP506. 엄격한 통제지역인 비무장지대 안 최전방 경계초소 중 하나다. 아군과 적군으로만 구별을 허용하는 GP에서 경계근무 중이던 소대원 대부분이 몰살당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수색대와 함께 사고 현장에 투입된 30년 경력의 군수사관 노성규 원사(천호진). 그는 제한된 시간 안에 참모총장의 아들로 신원이 밝혀진 GP506 소대장의 시체를 찾아내야 하는 임무를 상부로부터 부여받는다. 서둘러 시신을 수습코자 하는 소속부대 장교들과 다툼을 벌이던 노 원사는 소대원들을 사살한 것으로 보이는 의식불명 용의자 강상병(이영훈) 외에 또 다른 생존자가 있음을 감지한다. 21명의 소대원 중 시신으로 발견된 이는 모두 19명. 얼마 뒤 노원사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칼을 휘두르는 유정우 중위(조현재)를 발견한다. 노 원사는 항상 방탄복과 총기를 휴대하고 있어야 하는 경계병들이 무슨 이유로 문제의 사건이 벌어진 그날 모두 무장해제 상태였는지를 캐묻지만 유 중위는 진술을 거부한다. 외려 그는 노 원사가 꺼내 읽던 소대원들의 일기를 씹어 삼키는 등의 행동을 보이면서 본대 복귀만을 요구한다.

스릴러 장르라는 외피를 썼지만 <GP506>은 세련된 테크닉을 과시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대신 <GP506>은 공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캐릭터를 십분 활용해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 평론가들이 지적했듯이 <알포인트>의 소대원들은 ‘살아 있는 유령’이다. 그 표현을 빌려온다면 <GP506>의 소대원들과 그들을 찾아 GP506에 들어선 수색대원들은 ‘살아 있는 좀비’들이다. 알포인트이건, GP506이건 그들은 그저 살아 있을 ‘뿐인’ 시체들이다. 그들을 이렇게 만든 건 의미가 결여된 공간이다. <GP506>은 이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맨머리에 각인해놓는다. 냉전의 산물인 비무장지대와 GP506은 사라져야 마땅한 공간이지만 여전히 지속되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빈 의미를 생산하기 위해 소대원 개체들이 끊임없이 투입된다. 그 대가는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끈적한 선혈이다. 피로 GP506이 가득 채워져야만 과거의 진실이 토해져 나온다. 노 원사가 유 중위를 붙잡고 “과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캐묻지만. 실종되어 이상 행동을 보였던 마 병장 일행, 그리고 그들을 찾는 과정에서 소대원들이 괴질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시작했다는 과거는 노 원사의 추적으로는 불가능이다. 노 원사 일행이 GP506이라는 공간의 진실을 직접 체험하면서 혼란에 빠지는 후반부에 들어서야 영화의 박동이 빨라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GP506>은 스릴러 아니면 호러라고 편히 분류하는 것이 옳지는 않다. 무시무시한 공간을 상정한 탓에 외려 괴수영화 혹은 재난영화처럼 보인다. 개별 캐릭터들의 사연을 지운 것도“공간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감독의 의도를 좀더 도드라지게 하기 위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다만 이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는 것도 분명하다. “이 테이프가 발견되었을 때 우린 모두 죽어 있어야 한다.” 노 원사가 비디오테이프에서 잘려나간 강 상병의 마음을 이해하기까지, 그리고 그가 총을 들고서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기까지의 심리적 갈등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바이러스의 감염을 막기 위해서 여기서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는 이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겠다는 꿈틀거리는 본능을 극중 캐릭터들의 몸을 빌려 좀더 극적으로 부딪치게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GP506 소대원들의 죽음이, 원인 모를 바이러스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좀더 선명해지지 않았을까. 보이지 않는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애초에 감수한 딜레마였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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