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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이중성 <인크레더블 헐크>
오정연 2008-06-11

(헐크든, 배너든) 주인공의 연민 자극 지수 ★★★★☆ 시의적절 소심한 유머의 성공률 ★★★★ 아빠는 못 말려 지수 ★★★☆

스파이더 맨도, 아이언맨도 아니다. 마블산(産) 슈퍼히어로의 절대 강자는 코믹북으로, TV시리즈로 40년 넘게 사랑받은 ‘인크레더블 헐크’다. 이를 스크린에 옮기려는 첫 번째 시도였던 리안의 <헐크>(2003)는 엄밀히 말하자면 주요 캐릭터의 이름과 관계만을 사용한 영화적 주석 혹은 해석이었다. 반면 <인크레더블 헐크>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브라질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브루스 배너(에드워드 노튼)는 시작부터 도망자 신세다. 애초 <헐크>의 후속이라는 자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배너 안의 헐크를 무기로 이용하려는 썬더볼트 장군(윌리엄 허트)을 피해 시작된 여정은 대륙을 종단하여 뉴욕에 이르고,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진짜 괴물 어보미네이션(팀 로스)과 싸우기 위해 또 한번 변신을 감행한다.

“그런 파괴력을 억누른 채 사는 사람이 이렇게 얌전한 모습이라니.” 헐크 제거를 위한 치료제 발명을 돕는 스턴 박사가 배너에게 던진 말이다. <프라이멀 피어>부터 ‘샌님처럼 있다가 무서운 본성을 드러내는 변신’을 장기 삼았던 에드워드 노튼은 존재 자체가 헐크였다. <헐크>에 캐스팅 제의를 고사했던 그가 이번에는 제작과 주연, 공동 시나리오까지 수락했다. 헐크의 무한대 액션보다도 배너와 베티(리브 타일러)의 로맨스가 깊은 잔상을 남기고, 베티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는 녹색괴물의 모습은 킹콩 이래 최고의 ‘로맨틱 괴수’ 등극을 예감하게 한다. 모두 노튼의 캐스팅에 빚진 부분이다. 헐크와 배너가 번갈아 선보이는 몇몇 언어(?) 유희, 슈퍼히어로의 도시 뉴욕에 도착한 이들의 조크 등은 노튼의 지적인 이미지며 각별한 뉴욕 사랑과 맞물린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시나리오의 허점을 드러내는 이 영화가 창의적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피자 배달에 구걸까지 해야 하는 슈퍼히어로의 고단함은 <스파이더 맨>, 야수와 미녀의 애틋함은 <킹콩>, 어제의 괴물이 오늘은 영웅이 되는 억울함은 <엑스맨>과 연결된다. 좁은 골목을 누비며 진행되는 추격전은 본 시리즈 버금가는 쾌감을 선사하지만, 편집과 스턴트를 활용한 아날로그 액션으로 버무린 <트랜스포터>의 리테리어 감독은 자신의 능력을 성실하게 발휘한 것뿐이다. 마블 에터테인먼트는 보유 자산을 확실히 파악한 듯하다. 코믹북 속 5천여개 이상의 캐릭터를 발판으로, 21세기식 잔재미가 가미된 시나리오와 감독, 배우를 노련하게 캐스팅하여 원작의 골수팬과 평범한 블록버스터 관객을 동시에 포섭하는 전략은 <아이언맨>의 세계 제패를 가능케 했고, <인크레더블 헐크>가 그 명성을 잇는 것 역시 무난할 것이다.

<인크레더블 헐크>가 원작에 충실했는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코믹북 안에서도 회색괴물은 녹색괴물로, 해가 지면 변한다는 설정은 화나면 변하는 것으로 자리잡았다. 배너는 ‘인크레더블 헐크’를 포함하여 네 종류의 헐크와 한몸에서 살거나 헐크와 육체적 분리에 성공한 적도 있었다. 코믹북 헐크가 핵폭탄과 함께 살아가는 냉전시대의 불안을 반영했다면, TV시리즈 헐크는 분노를 유발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이중성에 치중했다. 극단적인 힘은 통제가 아니라 제거해버려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2008년의 헐크는 부시 정부와 동거하는 슈퍼히어로의 고민일까. 화나면 변하는 이 남자는 지난 46년간 시대와 매체를 달리하며 변이를 거듭해왔을 뿐이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 맨>이 영화를 통해 또 다른 몸을 얻었던 길의 출발점에 헐크 역시 서 있다. 출발이 일단 좋다.

TIP/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의 헐크, 루 페리그노가 경비원으로 얼굴을 비췄다. 마블의 대부, 스탠 리의 카메오도 여전하다. 물론 가장 큰 웃음을 선사하는 카메오는 <아이언맨> 속 토니 스타크. <13구역>의 애크러배틱 히어로 시릴 라파엘리는 블론스키의 펄펄 나는 액션에 스턴트 출연했다. 순식간에 헐크의 과거를 설명하는 오프닝은 마블의 간결한 로고를 제작한 타이틀 시퀀스의 마법사, 카일 쿠퍼의 솜씨다.

다른 ‘인크레더블 헐크’들과의 관계

리안의 <헐크>와 달리 제목부터 코믹북 원작과 TV시리즈를 따른 <인크레더블 헐크>는 선배들의 흔적을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우선 헐크의 기원. 코믹북의 브루스 배너 박사는 감마폭탄 실험 도중 아이를 구하려다가 사고를 당한다. 원작에서 설정만을 가져왔을 뿐 전혀 다른 이야기임을 강조하기 위해 주인공의 이름부터 데이비드 배너로 바꾸었던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에서 배너 박사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감마선에 노출된다. 자발적으로 실험대상이 된다는 설정이나 이때 사용하는 기계의 외양 등은 여러모로 <인크레더블 헐크>와 유사하다.

둘째 헐크의 상대. 헐크의 주요 적수는 방사능에 노출된 변종 생물들. <인크레더블 헐크> 속 어보미네이션은 코믹북에서도 헐크의 중요한 상대였으며 머리의 상처에 피가 흘러들어 변신을 암시하는 ‘미스터 블루’ 스턴스 박사 역시 코믹북에서 ‘리더’로 등장하는 캐릭터. TV시리즈에서 헐크를 쫓는 것은 괴물이 아닌 타블로이즈 기자 맥기로, <레미제라블>의 자베르에서 차용된 인물이다. 영화에서는 헐크 동영상을 제공하는 학보사 기자의 이름으로 카메오 언급된다.

마지막으로 헐크의 능력. 분노 지수에 따라 몸집이 무한대로 커지는 코믹북의 헐크는 이후 말수가 줄기는 하지만 간단한 문장을 구사하곤 했다. 반면 2m 정도의 아담한 사이즈로 고정된 TV시리즈 속 헐크는 늑대처럼 울부짖기만 했을 뿐이다. 말 못하는 짐승에 불과했던 리안의 헐크와 달리 2m74cm의 ‘인크레더블 헐크’는 킹콩처럼 포효하기도 하면서 “날 내버려 둬”라는 완벽한 문장도 사용한다. “헐크가 부숴버린다”(Hulk smash!)는 코믹북에 대한 오마주. 한편 “날 화나게 하면 좋지 않을 거야”라는 TV시리즈 속 배너의 유명한 대사는 영화에서 포르투갈어에 서툰 배너가 “난 배고프면 사나워져”라고 잘못 말하는 것으로 패러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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