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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죽 쒀서 쥐밥 주기
고경태 2008-06-20

촛불 독재다. 온통 촛불 이야기다. 이 칼럼에서도 벌써 몇주째 연속이다. 연일 신문의 칼럼들과 방송의 논평들 역시 매한가지다. 양초 말고 다른 걸 들어보려던 나 역시 굴복했다. 다른 이야기는 생뚱맞으리라. 그럴 용기가 없다.

청와대로 가려던 시민에게 경찰이 물대포를 쏘고 특공대를 투입했던 게 6월1일 새벽이었다. 그날 아침 인터넷으로 조·중·동 뉴스사이트를 읽으며 나는 진한 실망감을 느꼈다. 여전히 촛불집회를 불법으로 몰아서가 아니었다.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철없는 시민이 아닌 철없는 대통령을 타이르는 쪽으로 변해갔다. 날이 갈수록 조·중·동답지 않은 논조를 연출했다.

단적인 예로, 6월3일자 <중앙일보>를 보자. 3면에서 집중분석을 했다. MB에겐 지금 다섯 가지가 없다고. 그 다섯 가지란, 소통이며 포용이며 겸손이며 성찰이며 신사고란다. 한달도 되기 전 “김용선 교수도 미국 쇠고기 즐겨 먹는다”라는, 신문 편집사에 길이 남을 엽기적 헤드라인을 1면에 실었던 <중앙일보>다. 실제로는 당사자 인터뷰도 직접 하지 않은 기사를, 그것도 1면 머리에 올리며 이명박 정부를 끝끝내 감싸안으려던 용기는 경이적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분위기 확 바뀌었다. <조선일보>도 대통령을 질책한다. 심지어 김대중 고문까지 나섰으니, 말 다 했다. 6월2일자 ‘김대중 칼럼’은 말한다. “국민의 신뢰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자신의 실책을 호도하려고 ‘3개월’ 운운하며 시간 끌 것이 아니라 지체없이 읍참마속의 단호함을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 흑흑, 줄줄이 맞는 말씀~.

무서울 것이다. 거리에 나가면 조·중·동은 쓰레기 취급을 당한다. 대통령의 지지도는 10% 후반대까지 떨어졌다. 결정적 순간에 잘못 처신하면 자신들의 운명이 뒤틀린다는 걸 안다. 대세에 붙어야 한다. ‘극적인 변신’보다는 ‘기회주의’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거기에 비하면 조갑제 선생은 얼마나 초연한가. 그는 5월 말 “국민에게 항복할 필요 없다”라고 일갈했다. 그 소신은 휘어지지 않을 거다. 그의 홈페이지에선 ‘중앙일보 사설유감’, ‘조선닷컴의 좌편향적 편집’이라는, 조·중·동의 지조없음을 비꼬는 제목의 글들이 연일 릴레이를 잇는다. 그는 ‘극우꼴통’이라는 욕을 먹을지언정, 회색은 아니다.

우군이 많이 생기는 건 나쁘지 않다. ‘박사모’까지 촛불시위에 동참한다지 않은가. 정부와 여당도 한발 물러섰다. 두발, 세발 물러설 준비도 한다. 철지난 용어를 빌리자면 ‘개량화 국면’의 징후라 해야 할 것인가. 이 국면의 중요한 특징은 상대의 ‘결단’ 또는 ‘꼼수’에 어떻게 대응할지 헷갈린다는 점이다. 또 죽 쒀서 개 줄지 모른다는 점이다. 4·19 때, 서울의 봄 때, 6·10 때, 대한민국의 ‘피플파워’는 당했다. 타이·필리핀·버마·인도네시아 등 아시아를 넘어 라틴아메리카의 나라들에서도 그 반전의 경험이 쓰리다.

20년 전 국회 언론청문회에 나온 조·중·동의 사주들은 오히려 큰소리쳤다. “우리가 보도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6월항쟁의 들불이 일어났겠어?” 20년 뒤인 2008년엔 이렇게 아전인수할 것만 같다. “마지막에 대통령을 설득해줬잖아! 우리 없었으면 어떡할 뻔 했니?” 여론시장에서의 조·중·동 영향력이 어떤 식으로든 연장되고, 그의 친구들이 계속 정치판을 쥐고 흔들며 ‘촛불 정신’을 떠들 것만 같다. 촛불이 꺼지고 난 뒤 촛불을 켰던 자들은 촛농에 미끄러지듯 엎어지고, 엉뚱한 자들이 양초 값을 챙길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악몽이다. 이번엔 죽 쒀서 개밥통에 담지 말자. 아니, 쥐밥통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