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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좀비영화 특유의 카니발적 쾌락 <플레닛 테러>

오지절단 지수 ★★★★★ 밥맛 지수 ★ B급싸구려쾌락 지수 ★★★★★

나이를 먹으면 조금씩 변하게 마련인데, 좀처럼 변하지 않는 놈들도 더러 있는 법이다. 대표적인 영화 악동으로 손꼽히는 쿠엔틴 타란티노와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그라인드 하우스>를 통해 B급영화에 대한 무궁무진한 애정과 자신들의 영화적 뿌리가 어디에 맞닿아 있는지를 보여준다. 두편을 동시에 상영하는 그라인드 하우스의 영화적 전통에 따라 타란티노와 로드리게즈는 <데스 프루프>와 <플래닛 테러>를 각각 연출한 뒤 거기에 두편의 예고편을 더해 한편의 영화로 완성시킨다. <엘 마리아치>와 <저수지의 개들>에서 비롯된 선댄스의 만남 이후 늘 한 발짝 앞서 있던 것은 타란티노였지만, <그라인드 하우스>에서만큼은 로드리게즈의 압승이다. <플래닛 테러>는 70년대 B급영화를 그저 흉내만 낸 것이 아니라, 한동안 잊혀졌던 ‘싸구려저질유치뽕짝에로틱 B급영화’를 완전히 부활시킨다. 최고의 멀티플렉스 극장마저 퀴퀴한 냄새로 가득한 그라인드 하우스로 둔갑시키는 공간 이동술까지 발휘하며.

바이러스 DC-2가 퍼지며 텍사스의 어느 작은 마을은 좀비들의 천국으로 변모한다. 미국 정부의 배신으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멀둔 중위(브루스 윌리스) 일당이 바이러스 항체의 소유자를 찾아내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바이러스를 살포한 것이다. 마을 의사를 꿈꾸다 고고 댄서가 되었고, 이제는 코미디언이 되려 하는 체리 달링(로즈 맥고완)과 그녀를 한없이 사랑하는 미스터리한 과거의 소유자로 엘 레이(프레디 로드리게즈, 그 이름으로 보자면 <엘 마리아치>와 <데스파라도> 주인공의 또 다른 분신처럼 보인다) 등 몇몇 생존자들은 좀비들과 피비린내 나는 사투를 벌여야 한다. 로드리게즈는 조지 로메로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의 황당무계한 설정을 본떠 ‘인간 도축장’이라 불러도 좋을 살육의 향연을 선사하면서도, “세상에 맞선 두 사람”(Two Against The World)을 외치는 체리 달링과 엘 레이의 ‘트루 로맨스’(얼핏 이 영화는 <트루 로맨스>의 좀비 버전 같기도 하다)와 자신을 허접 재능의 소유자로 폄하하며 소심과 자학의 극치를 보여주던 체리 달링이 여전사로 변모하는 성장의 드라마까지 곁들인다. 좀비에게 잘려나간 한쪽 다리 대신 ‘머신건’을 꽂고 ‘기계-되기’에 성공한 체리 달링이 좀비 일당을 일거에 쳐부술 때, 그녀는 세상을 구원하는 의사이자, 관객을 웃겨주는 완전한 코미디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엘 레이와 체리 달링 외에도 톡톡 튀는 다채로운 캐릭터를 지켜보는 재미 역시 솔솔하지만, <플래닛 테러>의 가장 큰 매력은 그라인드 하우스 특유의 영화 체험을 되살려내는 방식이다. 갑작스럽게 영화의 색감이 바뀐다거나, 필름에 난 스크래치가 화면에 연방 굵은 빗줄기를 내리게 하는 것 정도야 동시상영관에서 살다시피한 소년 시절에 대한 향수어린 정감을 느끼게 해줘 고맙기 그지없지만, 시선집중 100%를 자랑하는 에로틱 장면의 절정에서 필름 릴이 불에 타 손상되었다며 능청스럽게 다음 장면으로 전환하는 ‘몹쓸 짓’을 자행할 때는 치떨리는 분노가 느껴진다(더구나 그녀는 다름 아닌 로즈 맥고완이 아닌가!). 하지만 새빨간 립스틱의 입술과 끈적끈적한 노골적 몸짓을 빅클로즈업으로 감칠맛나게 잡아주는 센스와 인간의 내장 기관을 상세히 보여주는 해부학적 서비스 정신은 세상의 금기를 비웃는 B급 좀비영화 특유의 카니발적 쾌락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악의 축 어쩌고저쩌고하며 세계 평화의 구세군인 척 행세하는 미국사회에 대한 조롱은 또 다른 양념이다. 참고로, 올 여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면 무엇보다 이 영화를 보라. 웃기고, 통쾌하고, 확실히 밥맛 떨어진다.

tip/<플래닛 테러>에 여러 종류의 저질 변태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중 단연 최고라 부를 수 있는 이는 체리 달링을 강간하려는 루이스일 것이다. 이 저질스러운 인물을 연기하는 이가 바로 쿠엔틴 타란티노다(로드리게즈 역시 잠깐 카메오로 출연하긴 한다). <그라인드 하우스>의 공동연출자이기도 한 타란티노의 저질 연기는 단연 압권인데, 좀비로 변하며 곰팡이 핀 녹차아이스크림 녹듯이 뚝뚝 떨어져나가는 성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체리 달링에게 마냥 ‘들이대는’ 그의 모습은 저질의 극치라 할 만하다. <플래닛 테러>의 타란티노는 정말 짧고 굵게 나온다. 여러모로(?).

그라인드 하우스란 무엇인가

그라인드 하우스란 두편의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던 극장을 말한다. 엄밀하게는 일치하지 않지만, 1980년대 부산의 보림극장이나 서울 영등포 주변의 소극장에서 두편의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던 방식을 연상하면 얼추 비슷할 것이다. 그라인드 하우스라는 용어의 시작은 1900년대 초기 보더빌이나 스탠딩 코미디를 공연하며 ‘덤프 앤드 그라인드’라는 춤을 선보였던 낡은 공연장이 극장으로 주로 사용되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그라인드 하우스에서 주로 상영한 작품들은 메이저 영화사의 주류영화가 아니라, 마이너 관객층을 노리며 소규모 자본으로 완성한 B급영화들이었다. 섹스와 폭력을 중심으로 주류영화에서 금기시되는 소재일수록 대환영이었다. <플래닛 테러>에서 예고편으로 소개된 <마셰티>는 이들 영화의 특성을 그 짧은 시간에도 적절히 보여준다. 금기를 조롱하는 듯한 근친상간과 노골적인 섹스신, 신체가 절단되고 피가 분출하는 폭력신 등은 그라인드 하우스가 가장 선호한 영화였다. 적은 예산 탓에 과감한 생략과 비약으로 본의 아니게 실험적 내러티브(?)로 만들어지는가 하면, 촬영 스케줄에 쫓긴 듯 얼렁뚱땅 연출을 마무리하기도 하며, 일관된 톤은커녕 필름 질감이 급격히 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필름 분실이나 손상에 의해 영화의 한신을 들어내는 일도 빈번했다. 하지만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갈 때까지 가는 막가파식 스토리의 강력한 에너지는 이들 영화만의 매력이었다. 1970년대 비주류 B급영화 마니아의 아지트였던 그라인드 하우스는 1980년대 비디오 시장이 크게 성장하며 사양길에 접어들더니, 1990년대에는 그 흔적을 완전히 감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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