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걸작 오디세이
[걸작 오디세이] 정치적 선전 혹은 웨스턴의 신전

<리오 브라보> Rio Bravo, 하워드 혹스, 1958

백인이 아닌 관객으로서 웨스턴을 본다는 게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특히 웨스턴 장르의 공식이 다듬어져가던 30, 40년대의 작품들을 보면 끝까지 참고 있기가 고문일 때도 있다. 존 포드의 <역마차>(1939)를 기억해보자. 이른바 ‘인디언’은 아무 이유없이 폭력을 일삼는 타자이고, 그래서 백인 영웅에 의해 파리 목숨보다 더 하찮게 죽임을 당한다. 외부의 유색인은 모두 처치의 대상인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그나마 제정신을 좀 차리는 것은 40년대 후반 좌파 성향 영화인들이 반성적인 시각을 드러내면서부터다. <하이 눈>(1952)이 그 사례다.

<리오 브라보> <하이 눈>에 대한 우익들의 답변

웨스턴의 걸작 중에서도 정치적인 시각에서만 보자면 역시 참기 힘든 게 많다.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1958)가 대표적이다. 먼저 그런 면부터 살펴보자. 이 영화는 <하이 눈>에 대한 우익들의 응답으로 주로 읽혔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존 웨인이라는 우파의 상징적인 스타가 주연으로 나온다. 그는 매카시즘이 한창일 때 반공산주의 진영을 이끈 우익의 대표적인 배우다. 하워드 혹스의 여성혐오적인 태도까지 고려하면 <리오 브라보>는 냉전 시절 우익들의 보수찬가처럼 보였던 것이다.

<리오 브라보>에도 <하이 눈>처럼 외부에서 악당이 도착한다. <하이 눈>은 그 악당을 매카시즘으로 은유했는데, <리오 브라보>는 이를 코뮤니즘(공산주의)으로 은유한다. 우파들의 시각에 따르면, 할리우드는 친소비에트적인 인사들 때문에 망조가 들어가고 있었다. 외부의 오염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는 게 보안관 챈스(존 웨인)의 책임이다. 악당들은 무리지어 다니고, 폭력을 일삼고, 돈으로 사람을 매수한다. 할리우드의 좌파들이 소비에트의 공작금으로 큰 집을 사고, 고급 차를 굴린다는 소문이 얼마나 많았던가. 주민들은 악당들이 싫지만, 무서워서 그냥 참고 산다. 여기에 보안관이 개입하고 나섰다. 말하자면 <리오 브라보>는 우익의 입장에서 읽은 매카시즘 당시의 미국사회의 축소판이다.

이런 갈등 구도 속에 존 웨인이 우파의 영웅 같은 인물로 제시된다. <리오 브라보>의 영웅은 <하이 눈>의 보안관(게리 쿠퍼)처럼 주민들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이런 일에는 아마추어들은 빠져야 하고, 프로들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주민들은 생업에 종사하고, 악당에 대처하는 일은 자기처럼 전문가가 나서면 되는 것이지, 뭐 하러 그런 일에 주민들을 끌어들이냐는 것이다. 존 웨인이 그 특유의 단호한 악센트로 어설픈 지원자들에게 “여기서 빠져”라고 씹듯이 말을 내뱉을 때, 그가 왜 그렇게도 남성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는지 알 수 있다. 악당을 압도할 수 있는 물리력과 테크닉을 소유한 그는 남성 판타지의 달콤한 대상이다. 단호한 존 웨인의 태도에 비하면 게리 쿠퍼는 연약한 햄릿이었다.

웨스턴 관습의 백화점

아마 <리오 브라보>가 이런 정치적인 주제로만 읽혔다면 영화사의 명단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카사블랑카>(1942)를 비평하며 한 유명한 말이 있다. 그가 볼 때, <카사블랑카>는 전혀 걸작이 아닌데 컬트가 된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한두개의 클리셰는 웃음만 나오게 하지만, 수백개의 클리셰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우리는 클리셰들이 자기들끼리 온갖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때문이다.” 에코의 주장을 적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웨스턴이 바로 <리오 브라보>다. 웨스턴에 등장하는 수많은 관습들이 등장하며, 그런 관습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다.

먼저 상투적인 캐릭터들이다. 물러설 줄 모르는 강인한 보안관(웨인), 허점을 가진 친구(알코올 중독자로 나오는 딘 마틴), 살룬의 경험 많고 매력적인 여성(앤지 디킨슨), 의리있는 동료(월터 브랜넌),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젊은이(리키 넬슨) 등이 주연급이다. 그리고 돈만 밝히는 악덕 자본가, 살룬 주인으로 나오는 희극적인 멕시코 남자, 돈 버는 것이라면 시체도 마다하지 않는 중국인 장의사(이런 일은 늘 유색인 차지다!) 등이 조연급인데, 이들은 웨스턴에 자주 등장하는 판에 박은 인물들이다. 웨스턴을 볼 때면 한번쯤은 등장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것이다.

이런 인물들의 연기로 <리오 브라보>는 늘 보던 테마를 반복한다. 남자들 사이의 충성심과 의리, 자긍심, 자기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투지와 노력, 금욕주의, 그리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겸손한 태도까지 제시한다. 이쯤 되면 웨스턴은 야만적인 서부의 학교이자 교회인 셈이다. 특히 남자 동료들의 우정에 관한 관습적인 묘사가 유명하다. 이들은 문명을 상징하는 가족과는 동떨어진 세상에서 자기들끼리 산다. 남성만의 공동체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우정의 의례로서 ‘담배를 나눠 피우고, 함께 노래를 부를 때’는 이곳이 남성동성애자들의 배타적인 공간처럼 비칠 정도다. 딘 마틴과 리키 넬슨이 이중창을 부를 때는 더욱 그렇다.

웨스턴의 수많은 관습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리오 브라보>는 이런 관습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바로 이런 점이 <리오 브라보>를 걸작의 반열에 올린 것이다. 감독의 의도가 아니라 ‘판에 박은’ 관습들 스스로가 수많은 웨스턴을 상상하게 하는 게 <리오 브라보>의 장점인 것이다.

다음에는 클리셰의 보고라는 마이클 커티즈의 <카사블랑카>(Casablanca, 1942)를 보겠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