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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곱게 늙읍시다
고경태 2008-08-01

갑자기 안 보이기 시작했다. 안경잡이가, 안경을 벗어야만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운 곳에 놓인 신문 활자, 휴대폰 문자 메시지, 이메일 편지함의 글씨들이 흐릿한 형상으로 내 눈을 놀리듯 간지럽혔다. 그것을 온전히 읽으려면 얼굴을 뒤로 가져가며 찡그려야 했다. 아니면 안경을 벗은 채 코앞에 들이대야만 했다. 40대 중·후반부터 찾아온다는 ‘노안’이 나에게는 불행하게도 좀더 일찍 닥쳤다. 절망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으나, 고참 선배나 부모세대의 전유물로만 치부했던 노화증세가 나에게도 찾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한동안 우울했다. 돋보기를 걸친 노인의 모습이 비로소 미래의 자화상으로 리얼하게 예감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몇달을 미루다, 안경점엘 갔다. 시력검사를 한 뒤 안경렌즈를 새로 맞췄다. 안경점 직원은 “노안이라기보다는 시력에 비해 너무 높은 도수의 렌즈를 써온 탓”이라고 말했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새 안경을 썼음에도, 눈앞 20cm 이내의 가까운 물체를 세밀하게 식별하던 예전의 능력은 복원되지 않았다.

나는 중년 초입에 일어나는 이러한 퇴화 현상을 나름 긍정적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본격적인 노화의 출발선 앞에서 겸손해지라는 몸의 신호로 말이다. 마음의 눈까지 총기를 잃을지 모를 테니 각성하라는 경고이자 암시로 말이다. 정신까지 늙는다면 몇배로 우울해질 것 같다.

몇년 전 대여섯 살 위의 어느 선배를 비난한 적이 있다. 이메일을 주고받다가 유난히 꼬장꼬장한 그의 태도에 화가 나 이런 말로 마무리되는 메일을 보냈다. “선배의 태도에서 꼰대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의외로 선배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음 깊은 곳에 (양궁으로 치면) 10점짜리 화살이 꽂혔다며 자성(!)하는 답신까지 보내왔다. 후배에게 늙다리 꼰대로 비치는 건 다른 그 무엇보다 치욕이라고 말했다. “곱게 늙자!” 중년을 맞은 이들에게 ‘곱게 늙기’는 인생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

곱게 늙기의 핵심은 젊은 친구들과의 의사소통이다. 그들과 말이 통해야 한다. 내 주변엔 곱게 늙는 어른들이 몇분 계시다. 환갑이 넘은 한 여자 선배도 그중 하나인데, 이런 말을 들려준 적이 있다. “자기가 반짝거릴 시대는 지났는데 죽을 때까지 반짝거리려고 하면 안 돼. 그 독선과 아집을 버려야 젊은 후배들이 내개로 다가와.” 그녀는 호기심이 노화를 방지하는 최고의 약이라고 했다. 호기심이 많으면 장수한다고도 했다. 10대와도 채팅 외계어가 통한다는 60대 소설가 이외수처럼.

때로는 곱게 늙는 노인들의 귀여운 상상력에 필이 꽂히기도 한다. 얼마 전 ‘매그넘 코리아’ 전시장에 갔다가 노장의 위트에 살짝 웃었다. 주인공은 엘리엇 어윗이라는 미국 출신 사진가였는데, 무려 80살이었다. 내가 웃은 건 그가 찍은 사진이 아니라 ‘그의 사진’이었다. 전시장 입구에 걸린 참여 작가 20명의 사진 속에서, 유독 그 작가만 70여년 전의 유치원복을 입은 예닐곱살 꼬마로 등장했다. 유치원복이 유치하게 보이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려는 그 노인네의 감성이 느껴졌다.

한국에는 유치원복 대신 군복에 향수를 느끼는 노인들이 무척 많다. 제대한 지 30, 40년이 넘어도 그들은 늘 자랑스럽게 ‘애국심의 표상’인 군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 사회봉사라는 명분 아래 호루라기를 불며 교통정리를 하는 거야 봐준다 쳐도, 국가에 대한 봉사라는 명분 아래 촛불집회장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건 무엇인가.

우·리···모·두··곱·게··늙·어··남·들·에·게··피·해·를··주·지··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