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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라면에도 ‘정치’는 있다

얼마 전 농심의 외주 캠페인 컨설턴트가 어느 기자의 블로그를 통해 농심을 옹호하는 글을 올렸다. 농심이 조·중·동 광고기업 불매운동의 ‘주적’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생긴 일이다. 컨설턴트의 주장은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이를테면 농심은 MSG도 GMO도 미국산 쇠고기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홍보하는 방법을 모르는 그런 회사란 설명이었다. 그런 그들이 ‘바보’일지라도 실제로 그렇게 나쁜 회사는 아니지 않겠느냐는 항변이었다.

농심에 억울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농심이 홍보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런 부분들을 저널이 추적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왜 농심의 반론은 들어주지 않느냐 (…) 괜히 농심 편 들어주다가 촛불민심 거스를까봐 그런 것 아닌가”라는 지적은 촛불시위에 우호적인 언론에서 새겨들어야 할 것인 듯하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라면이 ‘보수라면’과 ‘진보라면’으로 나뉠 수 있나? 라면맛에 보수맛과 진보맛이 따로 있나?”라는 주장에 깔려 있는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는다. 거칠게 말하면 이들은 라면에는 ‘정치’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물론 라면맛에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들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라면을 생산하는 방식, 판매하는 방식, 홍보하는 방식에는 정치적인 평가가 따를 수 있다. 나는 농심의 옹호자들이 “라면에는 정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GMO와 미국산 쇠고기를 사용하지 않는 농심은 삼양에 비해 정치적으로 못할 것이 없다”고 말하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따라잡기를 염원하는 선진국에서는 ‘정치적 소비’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가격경쟁력이나 품질경쟁력이 아닌 다른 정치적 요인에 의해 소비할 상품을 결정하는 소비자들의 행태를 의미한다. 가령 노동자들은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좋은 기업의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연대의식을 과시하고 장기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복리후생을 도모할 수 있다. 또 많은 시민들은 친환경적인 기업의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생태주의에 대한 지지의사를 드러낸다.

전경련 같은 단체나 한국의 시장주의자들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 기업에 ‘이윤 추구’ 이외의 다른 의무가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 같다. 하지만 “기업은 이윤을 추구한다”는 명제는 사실명제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정치적 소비’를 하면 그들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소비자들의 요구에 정치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이 명제를 마치 당위명제로 취급하여 기업은 가격경쟁력이나 품질경쟁력 이외의 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는 소비자들의 정치적 각성을 억누르는 어떤 형태의 근본주의에 불과하다. 농심을 위한 변명에 좀 찝찔한 구석이 있다면, 오직 품질에만 신경 쓴다는 그 ‘장인정신’이 바로 이런 형태의 근본주의를 소비자에게 강요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조·중·동 광고기업 불매운동의 구체적인 실현과정에 비판받을 부분도 있겠지만, 나는 이러한 조류에서 정치적 소비의 의미를 키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돈을 냄으로써 투표를 합니다. 세상을 해치는 인간들을 더 부유해지지 않도록 하는 거죠.” <죽음의 밥상>에 나오는 어느 소비자의 인터뷰다. 이 ‘마트에서의 투표’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