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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지구>
박혜명 2008-09-03

자연의 거대함에 압도당하는 지수 ★★★★ 자연의 생동감과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지수 ★★★★☆ 지구를 사랑하기로 결심하게 되는 지수 ★★★★★

북극에서 약 1100km 떨어진 지점. 해가 없는 겨울이 가고 북극에 여름이 왔다. 햇볕이 내려앉은 눈밭 한가운데 어미 북극곰이 고개를 내민다. 일부러 눈맞춤을 하듯 어미 북극곰은 흰자위 없는 새까만 눈으로 우리를 정면 응시하며 몇 차례 눈을 껌벅인다. 겨우내 굶은 어미곰과 새끼 두 마리가 눈구덩이 속을 빠져나온다. 사냥을 나갈 때다. 바다표범이나 바다코끼리가 사는 해안으로 가는 길은 아직 꽁꽁 얼어 있으니, 그 길이 녹기 전에 배를 채우고 돌아온다면 이들 가족에겐 행운일 것이다.

<지구>는 말 그대로 지구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시간적으로 지구의 1년을, 공간적으로 지구 북극에서 남극까지를 탐험한다. 태양을 향한 행성축의 기울기 23.5도가 만들어낸 이 푸른 별의 아름다운 규칙과 변화들. 6월이 되면 칼라하리 사막의 코끼리떼들은 먹이와 물을 찾아 오카방고 삼각주로 대이동을 한다. 그들이 삼각주에 닿을 무렵이면 그 땅은 생명이 풍부한 습지로 변해 있을 것을, 코끼리들은 안다. <BBC> TV다큐멘터리 시리즈이자 이 다큐의 모태이기도 한 <살아있는 지구>(Planet Earth)를 제작한 BBC 자연사단(The BBC Natural History Unit)은 두달 동안 이 코끼리떼를 쫓아다녔다. 소리에 민감한 코끼리의 성질을 감안해 프로펠러 돌아가는 헬리콥터가 아닌 초저주파 불가청음을 내는 항공기를 공중촬영에 동원했다. 아득하게 이어진 메마른 땅을 걷고 또 걸어 마침내 습지에 도착한 코끼리들. 아이가 동산을 뒹굴듯 그 커다란 덩치를 움직여 물속을 첨벙대는 그들을 극장에서 보는 느낌은 말로 형용키 어렵다.

<지구>에 담긴 형형색색의 변화무쌍한 자연은 인간의 예술적 상상력과 미적 감수성에 완전한 상대적 빈곤감을 안길 정도다. 암컷을 유혹하는 모습이 마치 검은 도포를 두르고 탭댄스를 추는 마술사 같은 파푸아뉴기니 섬의 극락조, 3200km의 벌판길을 300만 마리의 순록떼가 이동하는 장관, 먹이를 얻기 위해 6400km나 되는 바닷길을 헤엄쳐 남극해에 도착하는 혹등고래 어미와 새끼. 이 고래들은 소용돌이 모양을 닮은 크고 아름다운 물거품을 바다에 일으킨 다음 그 물거품 그물 안으로 크릴새우들을 한데 몰아넣고 마음껏 식사를 즐긴다. 이 식사가 끝나면 그들은 다시 다섯달 동안 헤엄쳐서 적도 부근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지구의 기온이 점점 높아져, 혹등고래가 남극 바다에 도착해 먹을 수 있는 새우들의 양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지구>는 엘 고어 전(前) 미국 부통령이 출연해 화제가 되었던 <불편한 진실>과 같은 주제를 공유한다. 어떻게 그 주제를 전달하느냐에 있어서는 남극과 북극만큼의 차이가 있다. <불편한 진실>은 과학적 수치와 환경적 증거들을 앞세워 인류의 삶에 닥칠 위기를 시급히 알리고, <지구>는 우리와 함께 이 별을 공유하는 다른 많은 생명들의 존재를 알린다. 두 방법은 모두 필요하되, 좀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인간에게 지구환경 보호의 윤리적 의무감을 갖게 하는 건 후자쪽인 듯하다.

<지구>의 순간들은 드라마 제작기간을 포함해 5년의 시간 동안 200여개 로케이션 촬영과 총 1천 시간의 촬영분량, 250일간의 항공촬영을 통해 얻어졌다. 극장판 다큐 제작비는 1500만달러이고 TV시리즈 <살아있는 지구>의 제작비는 4700만달러다. 이것이 다큐멘터리 사상 최고의 제작비라는 사실보다 중요한 게 있다면,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 세대가 경험하고 기록한 지구의 모습을 다음 세대도 누리게 되는 일일 것이다.

tip/아무래도 자연다큐멘터리이다 보니 극장에 가면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 관객과 많이 마주치게 될 것이다. 전체 관람가 영화 상영관에서 가족 관객을 만나는 일이야 종종 있지만, 어른에게도 놀랍고 신비로운 자연을 극장에서 보고 압도당한 어린이들의 적극적인 감상 태도를 미리 감안하고 상영관에 가면 더 좋겠다.

<BBC> TV다큐시리즈 <살아있는 지구>

극장판 다큐 <지구>의 많은 장면들은 TV다큐시리즈 <살아있는 지구>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2001년 세계 해양생물다큐멘터리 <아름다운 바다>(The Blue Planet)를 5년에 걸쳐 완성한 다큐멘터리 감독 알래스테어 포더질은 다시 5년에 걸쳐 <살아있는 지구> 제작에 들어갔다. 이 다큐 시리즈는 62개국, 204개 로케이션을 다니면서 촬영되었다.

<살아있는 지구>는 총 11개 에피소드로 이뤄져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 <극에서 극으로>는 시리즈 전체의 소개말 격이고, ‘산’, ‘민물의 세계’, ‘동굴’, ‘사막’, ‘극한의 얼음세상’, ‘대평원’, ‘정글’, ‘근해’, ‘계절림’, ‘심해’ 등 10개의 테마를 갖고 지구의 자연을 탐험한다. 이 다큐 시리즈를 통해 히말라야 눈표범이 야생염소를 사냥하는 장면이 처음 카메라에 포착됐다. 북극곰이 자신의 집구덩이에서 나오는 장면, 짧은꼬리원숭이가 물속을 헤엄치다 게를 잡아먹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어떤 장면들은 시청자에게 심리적 불편을 끼친다는 이유로 논란을 얻기도 했는데 십수 마리의 사자떼가 코끼리를 덮쳐 사냥하는 장면이라든지 바다코끼리를 사냥하러 나선 북극곰이 오랜 헤엄과 굶주림, 사냥 중 얻은 상처 등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 등이 그러했다. 이에 포더질 감독은 방송을 통해 다음의 안내문구를 내보냈다. “우리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것이지 시청자의 감성을 해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자연을 (인간의 관점으로) 걸러내려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실수라고 생각합니다만 시청자에게 결코 보여줄 수 없는 촬영물은 더 많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지구> 시리즈는 국내에서도 일반 DVD와 블루레이로 각각 구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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