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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흔적들 <멋진 하루>
박혜명 2008-09-24

섬세하고 은근한 멜로의 맛 ★★★☆ 누군가에겐 꼭 다시 보고 싶은 영화일 거란 확신 ★★★★ 누군가에겐 지루한 영화일 거란 확신 ★★★★

그들은 1년 전에 헤어졌다. 과거 연인이었던 희수(전도연)와 병운(하정우)은 이제 채권자-채무자의 사이가 되었다. 병운이 평상시처럼 경마장에 들어앉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가벼운 놈”과 그렇지 않은 놈을 구별하고 있던 토요일 아침, 느닷없이 나타난 옛 여자친구가 말한다. “돈 갚아.” 희수는 병운이 사업 자금 운운하며 (사귀던 당시에) 빌려갔던 350만원을 이 자리에서 당장 받아가야겠다고 까칠한 고집을 부린다. 수중에 그만한 돈이 있지 않은 병운은 자기만의 방법으로 돈을 갚기로 나선다. 병운은 희수의 차를 얻어타고 제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십시일반으로 돈을 꿔 모으기 시작한다.

돈 많은 연상의 여성 사업가에서부터 호스티스, 대학 시절 승마부 후배, 사촌, 심지어는 스키 강사로 일할 때 만난 제자라든가 이혼 뒤 싱글맘이 된 초교 동창에게까지 병운은 가릴 것 없이 손을 벌린다. 그 같은 ‘빚져서 빚 갚기 실력’에 희수의 입은 떡 벌어진다. 병운은 능청스럽게 말한다. “원래 인생이란 게 그런 거지. 내가 있을 땐 없는 사람 돕는 거고, 내가 없을 땐 있는 사람에게 도움 받고.” 다이라 아즈코의 동명 단편을 원작으로 한 이윤기의 네 번째 장편 <멋진 하루>는 빚을 해결하기 위해 하루 종일 서울 시내를 누비고 다니게 된 채권자-채무자 두 사람의 여정에서 시작해 그것으로 끝난다. 외형만 보면 뜬금없고 생뚱맞은 기행문이나, 여기서 얻어지는 결론은 돈 350만원이 아니라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흔적들이다. 둘이 자주 갔던 식당, 한 우산 속에서 나란히 빗속을 걸었던 기억, 서로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주고 음악을 공유했던 순간, “미안해”라는 말로 끝맺음했던 이별. <멋진 하루>는 보통의 영화가 취하지 않는 방식으로 로맨스를 이루어가는 애틋한 멜로영화다. 보이지 않는 선 위로 몇개의 점들이 찍혀 있을 뿐이어도 그것이 사랑에 관한 그림이었을 것임을 누구나 안다.

이윤기의 영화들은 언제나 마음이 닫힌 인물들을 데려와 그들이 지닌 상처를 세심하게 더듬고, 알아봐준다. 완전한 치유까지 약속하진 않아도 ‘당신에게 이런 아픔이 있었군요’ 하고 나지막이 인정해주는 따뜻함을 지녔다. 정혜(<여자, 정혜>)나 보경(<아주 특별한 손님>)에 비해 희수는 조금 더 수다스러운 여자일 뿐 그녀의 마음도 성하진 않았다. 삐딱하고 차가운 태도 속에 감춰뒀던 여린 속울음이 노을 비쳐드는 지하철 안에서 터져나오면서, 그녀의 멋진 하루는 흘러간다. <아주 특별한 손님>에 이어 디지털로 촬영된 <멋진 하루>는 분주하고 리드미컬한 로드무비 꼴을 갖추면서도 사색적인 여백을 많이 만들어내고 있다. 그 빈칸에 채워질 것은 우리 각자의 행복했던 기억이다. 사색과 카타르시스를 유도하기 위한 익숙한 모멘트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멋진 하루>는 삶의 고달픔으로 딱딱하고 옹졸해진 마음에 위로가 되기 충분하다.

<멋진 하루>는 배우 전도연의 치밀하고 비밀스런 연기력을 재입증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언뜻 보기에 이 영화에서 도드라지는 인물은 세상에 다시 없을 능청꾼 병운 역의 하정우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욕이나 실컷 해주려고 그랬는데.” 어둠이 깔리고, 병운과 헤어질 무렵이 되어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고 있는 희수의 영화다. <멋진 하루>에서 전도연은 도무지 이 순간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고, 그냥 타고난 자기 캐릭터만으로 뭔가 해보겠다는 게으름인가, 의혹과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사소한 것들투성이어서 지나치기 쉬운 것일 뿐, 곱씹고 눈여겨볼수록 이 영화의 섬세한 뉘앙스를 주도하는 것은 전도연이다. 그 놀라운 여운 때문에라도 <멋진 하루>는 한번 보고 잊어버리기가 아깝다.

tip/<멋진 하루>의 경쾌한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것은 하정우의 캐릭터 병운과 더불어서 이 영화의 음악이다. 30년대 뉴올리언스 재즈를 연상시키는 편안하고 경쾌한 재즈 선율이 제법 맵시있다. <멋진 하루>의 음악은 국내 퓨전재즈 밴드 푸딩(Pudding)의 리더 김정범이 맡았다. 김정범은 이윤기 감독의 전작 <러브 토크>(2005)에서도 음악을 맡아 재즈풍 스코어에 대한 남다른 창작력을 과시한 바 있다.

이윤기 사단

수많은 조연 캐릭터들이 진치고 있는 <멋진 하루>에는 감독의 전작들에서 보았던 낯익은 얼굴들이 꽤 많이 등장한다. 병운이 제일 처음 돈을 꾸러 가는 부유한 연상의 여성 사업가 ‘한 여사’ 역의 김혜옥은 <여자, 정혜>에서 정혜(김지수)의 엄마 역으로 출연했다. 이윤기 감독 전작 3편에 모두 출연했던 김중기는 이번 영화에서 ‘라이방’과 검정색 할리 데이비슨, 검은 가죽재킷으로 치장한 병운의 사촌 역을 맡았으며, 사촌 아내 역의 신영진은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 죽어가는 집안 어른을 두고 일가 친척들끼리 벌어지는 아귀다툼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바 있다. 이 아귀다툼의 현장에 있었던 또 한 얼굴이 <멋진 하루>에 등장하는데, 바로 병운의 승마부 후배 홍주(정경)의 남편 역을 맡은 김영민이다. 김영민은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 보경을 시골집으로 데려가는 두 청년 중 하나였다.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 죽음을 앞두고 시종 누워 있는 ‘연기’를 했던 기주봉은 이번 영화에서 김중기와 함께 중년의 오토바이족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혹시 당신의 눈썰미가 좋다면 <멋진 하루>의 희수와 병운이 버스 정류장을 지나칠 때 그곳에 한효주가 서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효주는 이번 영화에서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여자의 전화 목소리를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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