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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딛고 있는 비참한 현실 <자유로운 세계>
문석 2008-09-24

88만원 세대 지수 ★★★★☆ 공포 지수 ★★★☆ 신파 감성 지수 ★

앤지(키어스턴 워레잉)는 동구권 이민자들을 영국으로 취업시키는 인력송출업체의 직원이었지만, 상관의 성추행에 항의하다 해고된다.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떠안고 있는 싱글맘인 그녀는 생계를 고민하다 스스로 인력송출업체를 꾸리기로 결심하고 친구인 로즈(줄리엣 엘리스)와 함께 동업을 시작한다. 그녀는 타고난 붙임성에 미모까지 무기로 내세워 적극적으로 영업을 벌이고, 차츰 시장에서 인정받는다. 하지만 인력을 보낸 건설현장이 일방적으로 문을 닫자 노동자들은 그녀에게 격렬히 항의하고 앤지는 갈등하게 된다.

노동자를 비롯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약자의 입장을 옹호해온 켄 로치의 최근작 <자유로운 세계>는 두 가지 이슈를 다룬다. 하나는 이주노동자, 또 다른 하나는 ‘유연한’ 노동, 즉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비정규 노동의 문제다. 물론 이주노동자들이야말로 해고와 고용처럼 자본 입장에서만 유연한 이 시스템의 가장 큰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켄 로치는 현대 노동문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 주제에 관해 미국으로 불법이민온 멕시코 여성의 분투를 담은 <빵과 장미>(2000)를 통해 이미 다룬 바 있다. 같은 주제를 다루지만 <자유로운 세계>는 <빵과 장미>를 거울을 통해 뒤집어 비춘 듯한 영화다. <빵과 장미>는 주인공 마야가 노동자 ‘계급’으로 각성하는 과정을 담지만, <자유로운 세계>는 미숙한 유사 자본가가 자본의 논리를 깨달아가는 상황을 포착한다.

“착취의 과정을 고용주의 관점에서 보려 했는데, 그건 그 멘털리티를 이해하려 노력하기 위해서였다.” 켄 로치의 말처럼 <자유로운 세계>는 앤지가 왜 점점 냉혹하고 뻔뻔해지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애초 앤지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탐욕 때문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업을 펼쳐나가면서 그녀는 생존이라는 소박한 꿈조차 얼마나 다다르기 힘든 고지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앤지가 처한 상황은 구세대 노동자인 아버지에게 하는 대사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아버지는 30년 동안 같은 일만 했죠? 난 30번도 넘게 일을 갈아치웠다고요.” 결국 앤지 스스로가 ‘유연한’ 노동 시스템의 희생양인 탓에 탈출구 또한 그 시스템의 최말단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 이 영화는 이 시스템에서는 연대, 단결 따위의 구세대 노동계급의 미덕이 존재할 여지는 없으며, 모든 노동자가 개별화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자유로운 세계>는 우리가 발딛고 있는 비참한 현실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폭로하는 영화지만, 그 현실이 뭔지 알기 위해서 굳이 이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 수많은 이주노동자가 존재하는 한국 전역의 식당과 안산 등지의 소규모 공장, 그리고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이 ‘자유로운 세계’의 본질은 드러날 거니까. 새로운 연대와 단결의 싹도 거기에서 움트기 시작할 것이다.

tip/ 영국의 이주노동자 문제는 2004년 EU가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면서 본격화됐다. 폴란드 등 이주민들이 건설, 농업, 호텔업 등의 하위 비정규직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은 극심한 저임금,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유연한’ 노동을 보장하기 위해 대처 총리 시절 만들어진 각종 노동 관련법이 문제의 핵심. 최근 들어선 동유럽 경제의 활성화 등으로 고향에 돌아가는 이주노동자들의 수가 늘면서 서유럽의 비숙련 노동력이 부족하다는 문제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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