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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시나리오 전에 소설부터 쓴다
박혜명 2008-09-30

시나리오작가집단 스토리즘, 출판사와 콘텐츠 개발 계약 준비

영화 <강철중: 공공의 적1-1> 각본에 참여했던 한 작가는 요즘 글쓰기에 골몰하고 있다. 새로운 시나리오냐고? 아니다. 그가 집필 중인 것은 소설이다. 언젠가는 시나리오를 쓰려고 염두에 두고 있었던 아이템을 소설로 써서 책을 내려는 것이다. 소설가로 전업한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소설이 완성되고, 그것이 무사히 출간돼 시장에서 주목을 끌게 되면 그는 다시 자신의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쓸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지금 훗날 영화화될 ‘원작 소설’의 작가이자 각색자가 될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영화화될) 책의 아이템을 검토하고 개발비를 지원하겠다는 외부 제안을 몇번 받았다고 말한다. 책 출판과 영화화를 동시에 염두에 두는 사람들이 제작과 출판업쪽에도 있다는 얘기다.

이렇듯 시나리오작가가 훗날 영화화 작업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 외 장르에서 오리지널 콘텐츠를 기획·창작하는 경우는 또 있다. 시나리오작가집단 ‘스토리즘’은 국내 출판업체인 위즈덤하우스의 자회사 위즈덤미디어와 함께 원소스 멀티유즈를 위한 콘텐츠 개발을 놓고 일종의 공동작업을 위한 계약을 추진 중에 있다. 계약 내용과 관련한 상당 부분이 아직 미지수이나 양쪽 모두 이번 계약을 놓고 긍정적으로 검토 중인 것은 사실이다.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제작사가 아닌 출판사로 가고 있는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스토리즘 소속의 유영재 작가는 출판사와 접촉을 시도하게 된 계기에 대해 “첫 번째 요인은 요즘 한국영화계가 어렵다는 것이고, 두 번째 요인은 그런 시기적 상황 이전에 시나리오작가가 원래부터 업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가 열악했단 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작가들에겐 책 출판이 목적이 아니라 그걸 베이스로 자신의 오리지널 스토리가 영화화되는 것이 더 큰 목표다. 한국에서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갖는 힘은 정말 작고, 작가에 대한 대우도 박하다. 똑같은 오리지널 스토리라 해도 책으로 포장돼 있으면 제작사들이 한번이라도 더 볼 거란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특히 인지도 없는 작가라면 그냥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써서 제작사에 돌렸을 때 그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개런티는 적다. 반면 책이 있으면 일단 나는 원작자로서 원작자에게 주는 인센티브나 원작료를 받으며 작업할 수 있고 시나리오작가로서는 별도로 계약할 수 있다. 결국 작가들이 살아남고자 스스로 우물을 파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기획은 출판사쪽 이해와도 당연히 맞아떨어진다. 새로운 스토리와 새로운 작가 발굴이 가능하다는 점, 특히 여전히 순수문학쪽에 많이 치우쳐 있는 국내 출판문학계에서 시나리오작가들은 상대적으로 장르적인, 즉 대중적인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또 원작 소설이 정말 영화화된다면 그 뉴스만으로도 책의 매출 상승을 기대할 수 있고, 영화가 흥행하면 차후 드라마나 뮤지컬 등 다른 매체로 제작되었을 때 출판사가 그 판권료나 흥행수익을 작가와 배분해 가져갈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한 영화계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최근 <타짜>나 <식객>처럼 원작에서 시작해 영화,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계속 흥행되는 좋은 사례가 있다보니 역으로 작가와 출판사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그런 사례를 개발하려는” 움직임으로도 볼 수 있다. 또 다른 출판사의 경우 자사에서 번역, 출간한 외국 소설의 판권을 자체적으로 구매한 뒤 시나리오작가를 붙여서 다른 형태의 글로 바꾸는 작업을 물밑 진행 중이기도 하다.

출판시장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면 위험 부담 커

물론 출판사에서 시나리오작가를 포섭하는 목적과 시나리오작가가 출판사와 접촉하는 목적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스토리즘과 함께 콘텐츠 공동개발 작업을 위한 계약을 추진 중인 위즈덤미디어의 노진선미 대표는 이런 방식의 사업이 반드시 소설 장르와 도서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란 설명도 덧붙이고 있다. “여러 방식으로 풀어갈 생각이다. 책이 가장 주요한 수단이 될 것이고 영화화나 드라마화도 염두에 둘 수 있지만 시나리오 안에서 컨셉과 캐릭터, 스토리만을 추출해 온라인이나 모바일 서비스에 활용될 수 있는 포맷으로 발전시키거나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도서를 기획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새로운 기획에는 반드시 위험부담도 따른다. 최근 위즈덤하우스가 출간한 사극 소설 <은야>는 바로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영화쪽 스탭이 참여해 기획된 ‘영상음악소설’. 그런데 이 책은 시장에서 크게 화제가 되지 못했다.

또 좋은 시나리오가 반드시 좋은 소설이 될 것이란 보장도 없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출판시장에도 이쪽만의 방식과 메커니즘이 있다. 영화쪽에서 통할 소재라 해서 출판쪽에서도 통하는 법은 없다. 무엇보다도 책은 스토리만큼이나 글맛이 중요하다. 이건 번역책에서도 통하는 얘기다. 요즘 베스트셀러인 <로드>가 좋은 예다. 줄거리도 앙상하고 주제도 난해한 그 책이 잘 팔린 데에는 좋은 번역을 통해서 나온 매력적인 원작의 문체가 큰 몫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이런 지적은 작가쪽도 공감한다. 유영재 작가는 “시나리오만 들고 가면 그것이 바로 책이 될 것처럼 생각하면 일이 굉장히 어려워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작가들 스스로 저작권을 보장받고 활용하려는 움직임으로 귀추가 주목돼

어쨌든 시나리오작가들의 이 같은 새로운 활로 모색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영화계쪽에 검증된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는 방식이란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것은 작가들이 자신의 창작 콘텐츠에 대한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 활용하려는 움직임이란 점에서 의미를 띤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런 움직임의 배경에는 지금껏 오리지널 시나리오의 저작권 보호 문제를 충무로가 거의 무시해왔었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유영재 작가의 말은 이렇다. “스토리즘의 작가들이 13명인데, 크레딧을 가진 작가는 절반 정도에 불과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이 영화 작업을 안 한 게 아니다. 서너편씩 했는데 결국 노력과 시간만 소모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콘텐츠가 영화화될 수 있는 다른 루트를 찾다 여기까지 왔다. 지금까지 시나리오작가라고 하면 영화사가 돈이 적게 드는 기획개발 단계에서 기용하고 버리는 일이 잦았고, 그러다보니 작가들도 방어적이 되어서 자신이 가진 베스트를 내놓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태도를 풀고 자기가 가진 좋은 아이템을 작품화하자는 것이 궁극적인 취지다.” 그것이 어떤 긍정적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 귀추를 주목해본다.

시나리오작가와 결합하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노진선미 위즈덤미디어 대표 인터뷰

-위즈덤하우스는 경영·경제 관련분야 도서를 비롯해 자기계발서나 실용서적 위주의 출판회사로 알려져 있다. 위즈덤미디어는 어떤 성격의 자회사인가. =출판뿐만 아니라 매체를 통해 하나의 콘텐츠가 창출할 수 있는 다양한 수익 모델을 고민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출판영상통합기획사다.

-스토리즘 작가들과는 어떤 방식의 협업을 구상 중인가. =콘텐츠 개발을 함께하고 그 비즈니스는 우리가 맡는다는 선까지는 합의가 됐다. 다만 관계를 느슨하게 가져갈지, 작가 매니지먼트 방식의 긴밀한 관계로 갈지는 계속 협의 중이다.

-소설 이외의 책을 기획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시나리오작가들과 함께 만들 수 있는 다른 종류의 책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시나리오 자체가 책으로 나갈 수도 있지만 그 안에서 컨셉과 스토리, 캐릭터만 추출해서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케팅서나 자기계발서 같은 메시지북에 필요한 스토리텔링 작업을 함께할 수도 있다. 어떤 메시지를 이론만으로 전달하면 책이 딱딱해지지만 그것을 멘토와 제자가 만나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깨우쳐가는 과정으로 엮으면 상업성이 더 높아진다. 국내 출판계에는 이런 스토리텔링 작가로서 전문성을 띤 인재들이 많지 않다. 층 자체도 얇고, 기존에 활동하던 작가들은 이제 아이디어나 캐릭터에 고갈을 많이 느낀다. 그런 부분을 시나리오작가와 결합시키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스토리즘 외에도 다른 작가들이 있는지. =몇몇 작가가 있는데, 스토리즘과 같은 작가 모임 형식은 아직은 없었다. 그중 하나가 12월에 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어떤 책인가. =로드무비 장르의 영화 시나리오를 자기계발서로 바꿨다. 로드무비 형식대로 주인공이 길을 떠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건데, 영화는 감동이라면 책은 교훈이다. 결론적으로는 인생의 참의미를 던져주는 것이다. 그게 사랑일 수도 있고 배려일 수도 있는데 어떤 메시지가 될지는 올해 사람들의 심리나 트렌드를 기초로 만들어갈 것이다.

-올해 8월, CJ엔터테인먼트와 SBS 공동으로 ‘원소스 멀티유즈를 위한 콘텐츠문학상’ 제정 사업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한 관계자에 따르면, 이르면 오는 10월 중에도 공고가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던데. =세부적인 협의들이 남았지만 큰 그림은 합의가 끝난 상태다. 그 공모전을 통해서는 아무래도 영상화 가능성이 큰 작품을 선택하게 될 것 같다. 각자 채널에 적합한 작품들도 대상이 되겠지만 어쨌든 대중성을 염두에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