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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단편] 사랑 고백, 버튼 잘못 눌러 날아가다
이주현 2008-09-30

백종현 감독의 <부재중 통화 2건>

격정적인 바이올린 연주로 시작되는 비발디의 <사계> 여름 3악장이 배경음악으로 깔리고, 한 남자가 절망에 빠진 듯 쭈그려 앉아 담뱃불을 바닥에 비벼 끈다.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은 긴박함. 과연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인상적인 영화의 오프닝이 지나고 나면 대문 앞에 쭈그려 앉은 남자, 형석의 추레한 모습이 화면에 잡힌다. 형석은 어젯밤 친구들과 과음했고 필름이 끊겼다. 날아가버린 기억을 애써 찾아주는 친구의 전화. “근데 왜 그랬냐? 너 어제 서연이한테 고백했어.”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짝사랑해왔던 서연에게 그런 식으로 고백해버리다니. 형석은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서연에게 전화를 걸지만 상황은 꼬여간다. 감정 잡고 녹음한 메시지는 버튼을 잘못 눌러 날아가버리고, 마음 가다듬고 건 두 번째 전화에선 민망한 말들이 녹음된 채 배터리 부족으로 전원이 꺼진다. KT&G 상상마당의 ‘이달의 단편영화’ 5월 우수작 중 한편으로 선정된 백종현 감독의 <부재중 통화 2건>은 단편의 묘미를 잘 살린 코미디다. 재밌는 에피소드와 상황설정, 음악과 편집만으로 관객을 긴장시켰다가, 웃겼다가, 동정심까지 유발하게 만든다.

백종현 감독은 영화공부를 정식으로 해본 적이 없다. “부모님과 함께 주말의 명화를 보며” 영화에 처음 눈을 떴고 “재수, 삼수할 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영화만 봤다. 그 시기에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지만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는 대신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스물일곱이 되던 2008년 1월, 버리지 못한 영화에 대한 꿈을 펼치기 위해 첫걸음을 뗀다. 그것이 영화와는 무관한 삶을 살던 친구 두명을 데리고 만든 백종현 감독의 첫 번째 영화 <부재중 통화 2건>이다. 극중 형석을 연기한 윤형석씨는 17년지기 초등학교 친구이고, 조명을 맡은 김태일씨는 중학교 때부터 같이 놀던 친구다. 시나리오는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삐삐로 연락하던 시절이었다. 실컷 고백을 했는데 버튼을 잘못 눌러서 지워진 거다. 우물 정자를 눌러야 했는데 별표를 눌렀는지. 어쨌든 다시 하려니 도저히 감정이 안 살아나더라.” 삐삐는 휴대폰으로 진화했고 짜증스러웠던 당시의 경험은 영화로 탄생했다. 그러나 6분30초짜리 단편영화의 탄생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촬영은 1월에 1회 차로 끝났지만 영화는 4월이 돼서야 완성됐다. “촬영하고 나서 하루, 이틀 있다가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부모님이 모두 교사여서 할머니께서 나를 쭉 키워주셨는데, 돌아가시고 나니까 영화 찍지 말고 할머니랑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싶더라. 촬영한 파일을 컴퓨터에 저장만 하고 손을 놓았다. 상실감이 너무 컸다. 그래도 편집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4월에 편집을 마쳤고 5월에 상상마당에 출품할 수 있었다.”

백종현 감독

욕심을 부리지 않고 만든 데뷔작이 상을 탄 것에 본인은 물론 주위 사람들도 많이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놀라움은 그저 신기함이었다. ‘아니 네가 어떻게 그런 상을 받았지?’하는 의외의 결과에 대한 놀라움. 그랬기에 손뼉 치며 환호 받는 대신 “출품만 하면 전부 상 주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것도 형석 역을 연기한 친구에게서. 민망한 말은 또 들어야 했다. “상상마당에서 발행하는 잡지 <필사>에 <부재중 통화 2건>에 대한 평론이 실렸다. 방대한 지식으로 내 영화를 분석했더라. 읽으면서 내 영화가 이런 뜻이었구나 새삼 알게 됐다. (웃음) 그걸 또 친구한테 보여줬더니 ‘아니 우리 영화 평론할 게 뭐 있냐’고 하더라.” 그래도 100만원의 상금은 남았다. 친구들에게 맛있는 밥을 대접하고 남은 돈으로 두 번째 단편영화 <희생>(가제)을 만들고 있다. 8월에 촬영이 끝났고 지금은 후반작업 중이다. <부재중 통화 2건>과는 정반대지점에 놓이게 될 <희생>은 스릴러다. 히치콕의 팬이라는 백종현 감독은 “모든 장르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아직 부족한 게 많다”, “공부할 게 많다”는 말을 자주 입에 담았던 그의 다음 목표는 자연스럽게 한국영화아카데미로 이어진다. 전공 공부는 몰라도 영화에서만큼은 학구적인 그의 모습이 건강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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