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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난 어차피 눈뜬 세상보다 눈감은 세상에 심취해 있다”

<비몽>의 김기덕 감독

아직도 김기덕 감독을 한국영화계의 비주류로 인식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자기 세계가 확실한 열다섯편의 장편을 찍은 중견감독이자, 해외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한국 감독이고, 국내 제작환경에서 자신을 추종하는 신인감독들에게 입봉 기회를 나눠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감독이다. 한때 그는 혜성 같은 존재였지만, 이제 다른 행성들을 거느린 항성이 되었다. 그의 새 영화 <비몽>은 한국의 미가 담뿍 담긴 배경에 일본과 한국의 배우가 함께 각자의 모국어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저예산영화로, 주관객층은 국내보다 더 많은 유럽과 미국의 고정 팬들이다. 진정한 세계화는 (흔히 오해하듯 <디 워>가 표방한 미국식 거대자본화가 아니라)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황진미: <숨> 이후 좀 간격이 뜬 것 같다.

김기덕: 그렇지도 않다. 매년 초에 하나씩 만드는데, <숨>이 지난해 초, <비몽>이 올해 초에 만든 거다. 개봉이 조금 늦어진 거지.

황진미: 간격이 뜨는 것 같은 착각이 든 건 아마도 제작자로 나선 작품을 2편이나 봤기 때문인 것 같다. <아름답다>와 <영화는 영화다>에 대한 제작자로서의 평가는?

김기덕: 두 영화에 대해 나는 제작자라기보다는 후원자에 더 가깝다. 송명철 프로듀서나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가 실질적인 제작자라 할 수 있지. 난 항상 감독이고 싶지, 제작자이고 싶진 않다. 평가를 하자면 <아름답다>는 참 괜찮은 소재인데, 완성된 것은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베를린영화제에도 초청되고 감독에겐 좋은 기회가 된 것 같다. <영화는 영화다>는 꽤 만족스러운 완성도를 보이는데, 사실 시나리오는 훨씬 경쾌했다. 그걸 장훈 감독이 조금 무겁게 누른 것이다. 다들 거꾸로 알고 있지만.

황진미: <영화는 영화다>는 저예산영화인데 티도 안 나고, 주제의식도 상당한데 재미도 있어서 대중과의 소통도 가능한 영화다. 이런 방식이 하나의 길이 되지 않을까 싶더라.

김기덕: <영화는 영화다> 제작비는 정확히 6억5천만원 들었다. 제작자들에게 이 영화가 대안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결과가 좋기를 바란다.

황진미: 김기덕 감독 조연출이나 연출부 중에서 앞으로 입봉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더 있나?

김기덕: ‘돌파구’라는 이름의 모임이 있는데, 인원은 10~15명 정도다. 나와 생각을 공유하고 역량과 자질이 되는 사람들을 선별하고 있다. 그 안에서 치열한 경쟁도 이루어지고 있다.

황진미: 굉장하다. 이제 새로운 도제, ‘김기덕 사단’이 출범하는 건가?

김기덕: 그렇게 이름 붙이기보단 저예산으로 영화를 만드는 노하우를 익힌 프로덕션과 조감독, 스탭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영화 만들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도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황진미: 그건 분명히 좋은 방식이고, 현재의 제작환경에서 정말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어설프게 유학 갔다온 감독지망생들의 작가연하는 영화들이나 불필요하게 돈 쏟아부은 블록버스터들보다 훨씬 알찬 영화들이 나올 것 같다. 이제 <비몽>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캐스팅이 예사롭지 않다.

김기덕: 이나영씨는 조성규 대표의 선택과 인맥이다. 나는 배우에 집착하고 싶진 않다. 감독이 배우에 집착하면 곤란해진다는 걸 경험하기도 했고. 배우는 영화의 ‘좋은 재료’이다.

황진미: <숨> 기자간담회 때 장첸 캐스팅에 대해 질문하니까 “내 영화에 나오고 싶어하는 외국 배우들이 많다”는 말을 했는데, 오다기리 조도 그 일환인가?

김기덕: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사실이다. 오다기리 조는 내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했다.

황진미: 장미희씨도 요즘 TV를 통해 그분만의 독특한 캐릭터가 발현되고 있는데, 스크린에서 보니 참 반갑고 이미지도 잘 와닿더라.

김기덕: <비몽> 찍을 땐 TV에 나오기 전이고, 오히려 (학력 논란으로) 안 좋은 상태였는데, 내가 캐스팅을 결정했다. 장미희씨는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나면 내 영화를 지지한다고 말씀해주시고, 언젠가 꼭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셨다. 스님 역할도 하고 싶어하셔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겨울장면 주인공으로 캐스팅할까 심각하게 고려하다가, 영화의 균형이 깨질 것 같아 성사되진 않았다. 이후에 짧게 나와도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역할이 없을까 하던 차에 이번에 캐스팅을 한 것이다.

황진미: 세상에나… 장미희씨의 삭발 투혼을 볼 뻔했다니…. <비몽>을 보면서 역시 미술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작들에선 직접 미술감독을 겸하기도 했었는데, 이번엔 미술감독이 따로 있더라.

김기덕: 전체적인 컨셉은 내가 직접 잡았지만, 이현주 미술감독이 잘해주었다. <영화는 영화다>의 미술감독이었고, <피와 뼈>의 미술팀에도 참여했던 사람이다.

황진미: 장소가 모두 한옥이고 심지어 경찰서도 한옥이던데, 한옥 경찰서는 없지 않나?

김기덕: 종로구청을 경찰서로 개조해서 찍은 것이다. 한옥을 캐스팅하기는 어렵다. 가회동 등의 한옥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고, 웬만해선 빌리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집주인들이 내 작품 세계를 특별히 이해해서 빌려주신 것이다.

황진미: 한옥으로 100% 찍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김기덕: 이 영화가 뭔가 몽환적이고 켜켜이 퇴적된 기억이랄까,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있는 느낌을 담고 싶은데 양옥으로 가면 느낌이 확 떨어질 것 같았다.

황진미: 한옥과 한국의 색감과 문양을 고집한 건 외국에 보여주기 위한 의도도 있는 것 같다.

김기덕: 내 영화를 유럽영화제용 영화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는데, 실제 내 영화의 주관객층은 유럽인들이다. 외국인들을 겨냥하여 한국적인 화면을 구성하는 것은 시장을 유지하려는 의도이기도 하고, 동시에 ‘한국의 미’를 보여주려는 목적도 있다.

황진미: 나는 좋게 느꼈다. 그 ‘한국의 미’라는 것이 임권택 감독님 영화에서 그려지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지 않나? 19세기 전통양식이 아니라, 21세기 생활 속에 함께하는 ‘한국의 미’이고, 지금 인사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국 작가들의 성과를 보여주니까. 그것은 외국인의 눈뿐 아니라 우리 관객들의 눈에도 보여주어야 할 새로운 미학이다. 또 절 장면에서도 화면 왼쪽 상단에 불상이 마치 달처럼 떠 있고, 오른쪽 아래로 인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장면은 구도가 참 좋아서 그대로 정지시키면 그냥 그림이 되더라.

김기덕: 사실 장소며 구도며 조명에 신경 많이 써서 찍은 화면이다. 알아주니 고마운데, 안 좋게 보는 입장에선 오다기리 조가 일본어로 말하는 것도 유럽 상영을 염두에 둔 ‘오만’이라고 하더라. 유럽 관객 귀엔 한국어랑 일본어랑 다 똑같이 들리니까 전혀 이상한 줄 못 느끼겠지. 우리나라 관객이 보기엔 좀 이상할 수 있는데, 그래도 난 이 영화가 보편성을 주제로 삼은데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다루기 때문에 각자 나라말을 해도 그리 문제가 되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황진미: 처음엔 좀 이상한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박지아=이나영이고, 이나영=오다기리 조이므로 결국 그중 누가 어느 나라 말을 해도 다 통할 수 있지 않겠나? 영화를 아주 범박하게 이해하면 다중인격 영화인데, 그걸 해설해주는 뒷장면이 없는 걸로 볼 수도 있다.

김기덕: 충분히 다중인격 영화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박지아=이나영=오다기리 조’이기만 한 게 아니라 넷이 결국 같다.

황진미: 설마 넷이 같다고 생각하기엔 좀 조심스러웠는데. 적어도 셋은 같다고 생각했다. 타살되는 남자 하나는 독립적으로 봐야 할 것 같아서.

김기덕: 이 영화의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가 꿈속에서 공존하고 충돌하고 섞이는 것이다. 두 사람은 네 사람일 수도 있고 한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상대가 한 사람이 아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과 연결된 무수한 관계들, 꿈은 유전자의 기억이라는 대사도 나오듯 그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존재한다. 한편 사랑은 결국 자기 안의 자기를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황진미: 무슨 말인지 알겠다. 김기덕 감독의 전작들은 그래도 두개의 대립항이 맞물리고 회전하며 각자의 모순을 초극해나가는 이야기라서 쉬운 편이었지만, <비몽>은 두개의 항으로 출발해서 넷으로 분화했다가 하나로 합쳐지니 더 어렵게 느껴진다. 관객과의 소통은 더 어려워진 것 같다.

김기덕: <영화는 영화다> 같은 영화가 내 영화를 이해하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난 이제 그렇게 대중적으론 못 만든다. 어차피 눈뜬 세상보다 눈감은 세상에 심취돼 있어서.

황진미: 갈대밭 장면을 보면 영화가 그전까지의 전개에서 확 튀는 느낌이 난다. 그전까지는 오다기리 조가 꿈을 꾸면 이나영이 행동하는 것이니까 오다기리 조의 꿈과 이나영의 현실, 그리고 각자의 회상, 이렇게만 생각하면 되었다. 그런데 갈대밭 장면은 오다기리 조의 꿈도 아니고 이나영의 현실도 아니다. 이나영의 과거나 오다기리 조의 과거로 볼 수도 없다. 누구의 꿈인지, 누구의 현실인지, 누구의 과거인지 알 수 없다.

김기덕: 그 장면이 영화의 주제를 가장 함축하고 있는 장면이다. 일반적인 영화보기 관습에 따라서는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고. 그 장면을 뺀 버전도 있다. 그걸 빼면 영화가 한층 쉬워진다. 그냥 오디기리 조가 꿈을 꾸고, 이나영이 몽유병 속에서 그대로 행동하는 평이한 작품이 된다. 난이도를 낮춘 버전이랄까.

황진미: 난해하긴 해도 그 장면이 빠지면 안 될 것 같다. 그 장면은 지극한 사랑이 곧바로 엄청난 증오로 바뀌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애/증’이라는 말의 문자 그대로의 표현이지 않나? 버전이라니 말인데, 기자시사회 때 튼 것은 나비가 없는 것인데, 개봉은 나비가 있는 버전으로 한다고 했다. 무슨 차이인가?

김기덕: 난이도 차이다. 나비가 없는 것이 전문가용이고, 나비가 있는 것이 입문용이랄까? 관객의 이해도를 고려하여 비싼 비용 들여 CG까지 넣었지만, 난 나비가 없는 게 더 마음에 들고 맞다고 생각한다. 관객의 이해도를 고려해서 아예 색보정을 달리해볼까도 생각했다. 꿈, 현실, 과거 장면을 색깔을 달리해서 확 차이나게 하면 좀 쉽게 이해할까 싶어서. 하지만 그러면 유치해졌겠지.

황진미: 영화가 키스에서 시작해 섹스를 거쳐 타살, 자살로 나아가는데 나름대로 논리적인 귀결이라 생각하지만, 한동안 온순하게 끝맺던 김기덕 영화가 다시 폭력적인 결말로 갔다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김기덕: 나는 죽음이 꼭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은 에너지 운동의 한 현상일 수 있고, 아무도 모르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초월일 수도 있다. 죽음이나 폭력을 꼭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황진미: 다음 영화에 대한 구상은?

김기덕: 아직 없다. 쉴 생각이다. 이러다가 또 열망이 차오르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겠지만.

황진미: 시놉시스에서 시나리오를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걸리나?

김기덕: 시놉시스 단계에서 80%는 버려진다. 시나리오로 되는 것은 초고까지 1주일 걸린다. 어떻게 찍으면 되겠다는 그림이 나오면 그때부터 매일 고쳐서 한 30번 고친다.

황진미: 쉴 땐 뭐하나?

김기덕: 요즘엔 술 마신 상태에서 에세이를 쓴다. 나중에 묶어서 출판을 해볼 생각이다.

황진미: 작품마다 손수 썼다는 몇줄짜리 태그라인이 항상 좋았다. 그런 종류의 글인가?

김기덕: 비슷한 것인데 좀더 심화된 형태이다. 술 마시고 써서 그런지, 인간의식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보여주는… 다 타고 재만 남는 이야기랄까.

황진미: 글쓰는 것 말고는 뭐하나?

김기덕: 강원도에서 농사를 좀 짓는다. 김매고 밭가는 농사가 아니라 그냥 잡초를 그대로 둔 채 씨 뿌리고 놔두었다가 따는 것이다. 옥수수, 고추 등을 심는데, 밭에서 정성들여 키우는 것에 비해 열매도 작고 조금 열리지만, 더 맛있고 영양도 많다. 몰랐는데 그런 농사법이 생태농법의 하나로 원래 있다더라. 한번 해봐라.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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