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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오디세이] 누아르의 귀환, 천재의 귀향

<악의 손길> Touch of Evil, 오슨 웰스, 1958

<시민 케인>(1941)은 오슨 웰스에게 운명적인 작품이었다. 분명 명예도 누렸지만, 웰스는 이 작품 때문에 적지 않은 고생도 해야 했다. 바로 <시민 케인>에서 간접적으로 거론했던 언론재벌 허스트 집안과의 불화 때문이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미국에 보수바람이 거세게 불 때, 허스트 집안은 웰스를 끊임없이 공산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웰스는 어쩔 수 없이 미국을 떠나야 했다. 1948년 <맥베스>를 마지막으로, 그는 할리우드를 떠나 길고 긴 유럽 생활 또는 자의적인 유럽으로의 망명을 시작한다. 그의 나이 33살 때다.

<시민 케인> 때문에 유럽 망명길에 오른 오슨 웰스

미국으로의 귀환을 시도한 작품이 바로 <악의 손길>(1958)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10년 만에 다시 할리우드에 감독으로 돌아왔다. 제작자는 ‘B 무비의 왕’으로 불리던 앨버트 주크스미스. 사실 웰스가 제안받은 것은 악역인 형사 퀼란 역의 배우뿐이었다. 당시 웰스는 생계를 위해 별의별 시답잖은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주연인 멕시코 경찰 마이크 바르가스 역의 찰턴 헤스턴이 오슨 웰스가 감독이면 출연하겠다고 하여, 엉겁결에 연출도 맡았다. 손에 시나리오를 받아들었을 때, 촬영까지 남은 기간은 겨우 3주 반 정도였다. 웰스 전문가이자 감독인 피터 보그다노비치에 따르면, 웰스는 호텔에 틀어박혀 시나리오를 전부 뜯어고쳐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다. 그는 원작 소설 <악의 배지>(Badge of Evil)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선악의 구분이 비교적 분명하던 원작은 웰스에 의해 그 특유의 선악 구분이 모호한 이야기로 재탄생했다.

영화는 처음엔 악인 퀼란과 선인 바르가스와의 대립으로 시작한다. 퀼란은 경험 많은 미국인 형사인데, 고집불통 독재자이고 인종주의자이다. 바르가스는 유엔대표부 멕시코 경찰인 엘리트다. 원래 미구엘인데, 미국식인 마이크로 더 잘 불린다. 그의 아내는 금발 백인 미국인인 수지(재닛 리)이다. 부부가 막 신혼여행을 시작할 때, 국경에서 폭발사고가 난다. 어느 미국인 개발업자가 멕시코에서 젊은 애인을 싣고 출발한 뒤 미국에 들어오자마자 그의 차가 폭파된 것이다. 이 수사에 두 국가의 경찰인 퀼란과 바르가스가 참여하는데, 처음부터 퀼란은 멕시코인과의 협업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낸다.

너무나 유명한 도입부의 3분에 걸친 트래킹 숏은 웰스가 얼마나 스타일에 집착했는지 짐작게 한다. 오랜만에 미국에 돌아온 그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관객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불과 26살에 <시민 케인>을 만든 ‘천재’의, 세월과 함께 더욱 관록이 붙은 솜씨에 저절로 탄성이 나오게 하는 장면이다. 이쪽과 저쪽의 구분이 모호한 국경마을, 백인과 유색인들, 부자와 가난한 자들, 질서와 혼란, 법과 폭력 등 주요 테마들이 도입부의 트래킹 속에 모두 제시된다. <시민 케인>으로 미국 누아르의 발전에 초석을 놓았던 그가, 이제는 유행이 지난 스타일인 누아르를 다시 이용하여 자신만의 바로크적 세계를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다.

멕시코인으로 분장한 찰턴 헤스턴

사실 멕시코인 경찰로 찰턴 헤스턴이 나온 것은 의외였다. 백인 남자가 얼굴에 칠을 하고 나왔는데, 이는 지금 봐도 좀 어색하다. 팀 버튼의 <에드 우드>(1994)는 이에 대한 궁금증을 일부 풀어준다. 영화에서 에드 우드가 제작자들의 이해되지 않는 캐스팅에 불만을 늘어놓자, 웰스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유니버설에서 스릴러를 만든 적이 있는데, 제작자들은 멕시코인으로 심지어 찰턴 헤스턴을 원했어.” <악의 손길>의 제작사는 유니버설이다.

그런데 백인이 유색인으로 분장한 것, 달리 말해 속이는 것은 대단히 암시적인 장치였다. 그런 위장이 엘리트 경찰 바르가스의 정체성을 좀더 분명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증거를 조작하여 숱한 피해자를 만들어내며 업적을 쌓아온 악인 퀼란은 그렇다치고 이른바 엘리트라는 바르가스도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비열한 속임수를 서슴지 않는다. 녹음기를 이용하여 퀼란의 범죄 사실을 몰래 기록하려는 것이다. 퀼란은 오랜 파트너인 멘지스(조세프 칼레이아)에게 배신당한 사실도 모른 채 범죄자들을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작도 몇번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명색이 유엔 소속 엘리트라는 바르가스는 그 고백을 녹음하기 위해 쥐새끼처럼 다리 밑에 ‘숨어’ 있는 것이다. 두 남자 모두 목적을 위해선, 수단의 정당성 따위는 따지지 않는다. 이쯤되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선뜻 대답하기가 곤란한데, 이런 선악 구분의 모호함은 웰스 영화의 일관된 주제로 남아 있다.

<악의 손길>은 조연들의 연기가 눈부신 작품으로도 기록된다. 멘지스 역의 칼레이아는 물론이고, 멕시코 갱스터 두목으로 나오는 아킴 타미로프(나는 한때 오직 이 사람 연기를 보려고 웰스 영화를 본 적도 있다), 술집 주인의 마를렌 디트리히 등은 짧은 순간이지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웰스는 할리우드로의 귀향을 꿈꿨지만, 이 영화를 발표한 뒤에도 계속하여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그는 영원히 세계를 떠도는 망명자로 남고 말았다.

다음엔 정착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의 고전인 존 포드의 <수색자>(The Searchers, 1956)를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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