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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라스트 댄스
고경태 2008-10-10

“에미랑 의절하고 싶니?” 지난해 11월 이곳에 칼럼을 썼다가 70대 노모의 노여움을 샀다. 그분은 시간이 많으셔서 틈만 나면 아들의 글을 포털로 검색하여 꼼꼼히 읽으신다. 어머니를 분노케 한 글의 제목은 ‘어린이 종교개혁’이었다. 대한민국에는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 눈치를 보며 효도 차원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자녀들에게 종교 선택의 자유를 줘야 한다는 요지였다. 평생 골수 기독교신자로 지내신데다 아들의 신앙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당신은 배신감에 떨며 한동안 연락을 끊었다. 색다른 ‘필화 사건’이었다.

오늘은 마지막 칼럼이다. 은혜롭게 종지부를 찍는 의미에서, <씨네21> 필진으로 참여했던 1년4개월 동안 유일하게 겪은 그 필화 사건을 반성(!)하며 성경구절을 인용하고자 한다(내 평생 성경구절 인용은 처음이다 +_+).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태복음 6:31~32)

이방인이었나보다. 밥벌이하는 신문사에서 내가 참여해 만든 매거진섹션 <Esc>의 모토는 그 말씀을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었다. 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고 고민하는 콘텐츠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완고한 독자들에겐 “먹고 마시고 노는 거에 대한 허영심을 부추기며 공의(公義)를 외면한다”는 비난도 받았다.

앞의 성경구절 바로 다음에선 예수가 또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맞다. 나는 이곳에 글을 쓰면서 비로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척 포즈를 취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의를 구하고픈 마음은 별로 없었는데,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라는 칼럼의 컨셉이 그랬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쓸 수는 없었다.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3주에 한번 연설대 앞으로 불려나오는 느낌이었다. “인간의 주름살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베어낸 칼날”이라는 말이 있다. 수많은 독자 군중의 부담스런 시선을 견디며 이 연사 외치고픈 뜨겁고 간절한 그 무엇이 없었음을 고백한다. 도올 김용옥씨는 한 인터뷰에서 “아이디어들이 글로 써달라고 아우성을 친다”는 말로 다작의 비법을 잘난 척한 적이 있다. 반면에 나는 집나간 아이디어를 찾아 헤매며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렇게 쥐어짠 글을 송고할 때마다 <씨네21> 심은하 편집팀장에게 이렇게 물은 건 우연이 아니다. “말 되나요?”

언론시장에서 유통되는 칼럼의 절반은 공해다, 라고 생각한다. 신문·잡지·인터넷 매체의 종이와 화면을 분칠하는 수많은 언어의 유희와 칼날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0.1mm라도 움직이는 글들은 많지 않다. 나 역시 사회적 공기오염에 일조했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단, 공기를 조금이나마 덜 오염시키기 위해 이렇게 노력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먼저 개폼을 잡지 않으려고 했다. 복장으로 표현하면 정장보다는 캐주얼, 구두보다는 가벼운 운동화 차림이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가 아니라 게슴츠레하게 졸린 눈으로 말하고 싶었다. 숨막히는 공자 말씀보다는 가슴을 열어주는 유머로 소통하고 싶었다. 냉혹하고 가열찬 믹서기가 아니라 공감의 온기를 전하는 가습기가 되고 싶었다. 사실, 다 뻥이다. 공부도 안 하고 함부로 글을 쓴 자의 뻔뻔스런 변명이다. 독자 여러분께 죄송할 뿐이다. 아무튼 마지막 글의 결론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늘 뻔질나게 고민하되 가끔 그의 나라와 의도 구하는 게 민주시민의 센스라는 것! 다음 기회에 만나기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