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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감독의 대화의 장 <도쿄!>

미셸 공드리 지수★★☆ 레오스 카락스 지수 ★★☆ 봉준호 지수 ★★★☆

장 르누아르, 오슨 웰스, 오즈 야스지로가 모여 만든다 해도 그 옴니버스영화가 그들 각자의 영화 한편보다 더 흥미롭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옴니버스영화는 늘 조금 넘치는 욕심이거나 적당한 기획이고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더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짊어지게 되는 고행의 프로젝트이거나 그나마 마음먹기에 따라 편하게 한번 쉬어갈 수 있는 작은 놀이터다. 사실은 한 사람이 하면 더 잘할 만한 걸 구태여 몇 사람이 나눠 갖는 일이다(작품당 최소 2시간의 러닝타임을 보장할 게 아니라면 대체로 그렇다). 하지만 같은 소재를 공유하거나 모이기 힘든 이들의 영화가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인지, 옴니버스 제작은 멈추지 않는다. <도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 소재는 도쿄이며 모인 건 미셸 공드리, 레오스 카락스, 봉준호(영화가 상영되는 순서)다.

첫 번째 일화 미셸 공드리의 <아키라와 히로코>는 도쿄를 방문한 시골뜨기 영화감독 지망생 아키라와 그의 여자친구 히로코가 친구의 쪽방에 얹혀 지내다가 둘이 헤어져 남자는 뭘 하는지 모르고 여자는 나무의자가 되는 이야기다. 일상처럼 시작하지만 판타지가 되며 판타지의 매개는 ‘변신’이다. 변신은 공드리의 영화에서 끈질긴 영화적 구애의 항목이다. 공드리의 인물들은 어떻게든 변신해야 하며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다. 이번에는 여자의 마음에 변화가 오자 그녀의 몸이 변신한다. 두 번째 일화 레오스 카락스의 <광인>은 땅 밑에서 올라온 괴인이 땅 위의 세상 도쿄를 발칵 뒤집어놓고 허공으로 사라지는 이야기다. 그는 악행을 저지르지만 한편으로는 알아듣기 힘든 언어로 뭔가 세계에 자꾸 일침을 놓고 꾸짖으려 한다. 하지만 레오스 카락스가 이 영화를 무엇 때문에 만들고 싶어했는지는 좀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곳곳에 예기치 않은 유머가 도사리고 있고 마지막 장면은 그 기이한 유머의 백미라 할 만하다. 세 번째 일화 봉준호의 <흔들리는 도쿄>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히키코모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다. 11년 동안이나 집 안에 틀어박혀 있던 한 남자는 피자 배달원으로 자기 집을 찾아오던 한 여자가 자기처럼 결국 집 안에 틀어박혀 히키코모리가 되자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다. 봉준호는 사태를 아이러니하게 만든 다음 극적으로 해결하는 데 본능적인 실력을 가졌다. 나머지 두 감독이 도쿄의 야경이나 이미지에 먼저 골몰한 것에 비해 봉준호가 도쿄의 지층적 태생, 즉 지진을 끌어들여 클라이맥스를 만드는 건 차별되는 재치다. 이병우의 기타음도 이 영화의 리듬감에 한몫하고 있다.

세 감독 모두 태만하지 않고 작업에 임한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미셸 공드리의 영화는 여전히 그냥 산만하고 귀여운 정도로 만족해야 하고(도대체 언제까지?), 레오스 카락스는 드니 라방의 동물 같은 육신의 움직임에 영화 전체를 의탁하고 있다. 봉준호는 나머지 두 감독보다 짜임새있고 세련된 호흡으로 자기의 주제를 관리한다. 무엇보다 주어진 러닝타임의 제한과 그 시간 동안 다뤄져야 할 주제와 그 주제를 부각시킬 수 있을 장치 및 동선이 박자를 맞추고 정확한 계산 속에 잘 어우러져 있다. 하지만 그에게 기대하는 것보다는 역시 유순하고 기계적이어서 봉준호의 정말 새로운 면모를 봤다고 말하는 것 까지는 어렵다.

만든 이들은 대화의 장으로 생각하고 임했겠지만 본의 아니게 경연의 장처럼 보이는 게 옴니버스영화다. 그래서 구태여 하나를 꼽는 재미를 피할 길이 없다. 세 작품 중 한 작품을 꼽자면 봉준호의 <흔들리는 도쿄>가 될 것이고, 전체를 통틀어 단 한 장면을 꼽자면 의외로 그건 <광인>에 있다. 교수형당해 죽은 줄만 알았던 광인이, 즉 드니 라방이 목이 매인 채 유리벽 너머에서 슬쩍 다리를 올려 손가락으로 끼적끼적 허벅지를 긁어대는 그 순간은 소스라칠 만큼 기이하고 멋진 몸의 형상이며 죽음에 관한 유머다.

Tip/‘히키코모리.’ 너무 유명해진 용어? 1990년대 이후 급격히 늘어나 일본의 사회문제로 떠올랐고 그만큼 영화에서도 자주 접하게 된 일본의 은둔형 외톨이들. 사회 부적응자로 집 안에 스스로 갇혀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

‘도쿄’를 그린 배우들

미셸 공드리, 레오스 카락스, 봉준호가 ‘도쿄’를 그리려고 할 때 그들은 어떤 배우들을 떠올렸을까. 미셸 공드리의 페르소나는 최근 많은 영화에서 주목받고 있는 일본 배우 가세 료(<허니와 클로버>)와 후지타니 아야코(<캡틴 토키오>)다. 이 둘은 순수하면서도 좀 모자란 듯한 한쌍의 연인 역을 맡아 도쿄의 일상과 판타지가 교차하는 하루하루를 명랑하게 보여준다. 특히 가세 료는 장난을 칠 때, 후지타니 아야코는 멍하니 서 있을 때 더 귀여운 표정을 짓는다.

레오스 카락스는 죽마고우 드니 라방을 도쿄로 불러들였다. 레오스 카락스가 광인으로 선택할 만한 적임자가 드니 라방 말고 또 누가 있을 것인가. 드니 라방은 <소년 소녀를 만나다>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 등 카락스의 전성기를 함께했으며 <도쿄!>로 16년 만에 재회했다. 이 영화는 거의 레오스 카락스의 연출이 아니라 드니 라방의 단련된 육신에 의해 긴장감이 조성된다고 봐야 한다.

<흔들리는 도쿄>에서는 뭐니뭐니해도 가가와 데루유키의 히키코모리 연기가 일품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씨의 발차기를 보면서, 아! 나도 저 발차기에 한번 맞아봤으면… 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는 우스개 고백을 할 정도로 가가와 데루유키는 봉준호 영화에 애정이 깊었다. 한편 봉 감독 역시 가가와 데루유키가 오다기리 조와 함께 출연했던 <유레루>에 관해 일찍이 큰 관심을 보인 바 있고 그의 연기에도 깊은 신뢰감을 갖고 있었다. 그 밖에도 이 영화에는 피자 배달원으로 불쑥 등장해서 극중 기류를 확 바꿔놓는 다케나카 나오토(<워터보이즈>의 엉터리 수영코치이자 <스윙걸즈>의 엉터리 재즈선생)가 한몫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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