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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오디세이] 영화가 영화를 이야기하다

<선셋대로> Sunset Blvd. 빌리 와일더/1950

TV의 등장에 자극받은 영화는 자기 자신을 다른 매체와 비교하기 시작한다. 자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TV의 활약으로, 영화는 스스로를 거울에 비추어보는 성찰의 순간을 맞는다. 다시 말해 영화는 자의식을 가진 것이다. 이런 변화를 반영한 중요한 작품이 바로 1950년 같은 해에 발표된 <이브의 모든 것>과 <선셋대로>다. <이브의 모든 것>이 연극의 세계를 비춤으로써 영화의 속성을 미루어 짐작하도록 기획됐다면, 빌리 와일더의 <선셋대로>는 영화 자체를 영화의 소재로 삼았다. 더욱 직접적이고 자기 반영적인 것이다.

TV 등장으로 영화의 성찰적 태도 늘어

제목인 ‘선셋대로’ 자체가 반영적인 어휘다. 이 거리는 할리우드의 스튜디오들이 처음 들어서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20년대 후반부터는 스타시스템의 발달과 ‘토키영화’의 대중화로 거부가 된 스타들이 양산됐는데, 이들이 선셋대로로 대거 이주하는 바람에 이 거리는 성공한 스타들의 상징적인 거주지가 됐다. 그러니 제목인 ‘선셋대로’는 영화에 관한 영화임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풀장에 죽어 있는 시체가 플래시백을 펼치는 유명한 도입부를 지나, 그 시체의 설명을 따라, 화면은 선셋대로에 있는 유령이 나올 것 같은 저택 앞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조 길리스(윌리엄 홀덴)라는 이 남자는 할리우드에서 출세하고 싶은 삼류 시나리오작가인데, 자동차 할부금을 내지 못해 차를 차압당할 위기에 놓였다가, 급하게 도망쳐 우연히 이 저택에 들어왔다. 버려져 있는 듯한 기분을 주는 저택은 그의 말대로 데이비드 린의 <위대한 유산>(1946)에나 나올 정도로 공포감을 자극한다. 정원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풀장에는 쓰레기 더미가 굴러다니며, 테니스 코트에는 네트가 찢어진 채 방치돼 있다. 고딕 시대의 성처럼 기괴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는 저택에서 뜻밖에도 무성영화 시대의 대스타인 노마 데스먼드(글로리아 스완슨)를 만난다. 사운드의 도입과 더불어 적지 않은 스타들이 새로운 테크닉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은퇴했는데, 데스먼드도 그들 가운데 한명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진에 둘러싸인 채 온갖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몸에 걸치고 여전히 스타 중의 스타처럼 행동한다. 글로리아 스완슨은 실제로 사운드의 도입 이후 은퇴한 무성 시대의 대스타다. 그녀는 세실 B. 드밀 감독의 감상적인 로맨스영화의 주인공으로 1920년대를 풍미한 배우다. 드밀 감독은 물론이고, 상대역으로 종종 나왔던 루돌프 발렌티노와 염문을 뿌리며 숱한 가십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게다가 그녀는 실제로 선셋대로의 이탈리아 궁전 스타일의 대저택에 살며 많은 영화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또 집값과 맞먹는 의상, 보석, 장신구 등을 걸치고 연기하는 바람에 ‘럭셔리’하면 글로리아 스완슨을 떠올릴 정도였다. 영화에서는 이탈리아의 명품 수제 승용차인 이소타-프라스키니(Isotta-Fraschini)를 타고 나오는데, 그런 어마어마한 가격의 명품과 스완슨은 거의 동의어처럼 수용됐다. 영화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화려함과 사치, 그리고 염문의 극치를 과시하는 스완슨은 대중의 꿈을 자극하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의 스타였다.

영화 속에서 자기를 연기한 글로리아 스완슨

그러나 현재의 스완슨은 거의 완벽하게 잊혀져 있다. 그런데 그녀가 연기하는 데스먼드는 진짜 스완슨의 현재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데스먼드는 한때 자신의 감독이었던 맥스(에리히 폰 스트로하임)라는 남자의 시중을 받으며, 철저히 은둔한 채 살고 있다. 사운드가 등장하며 영화는 쓸데없이 말이나 지껄이며 경솔해졌고, 그렇게 왜소화된 영화에는 자신과 같은 대배우는 더이상 맞지 않다며, 지금의 영화 환경을 경멸한다. 영화를 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변화된 환경에 대한 증오가 숨겨져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쯤 되면 글로리아 스완슨이 노마 데스먼드를 연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데스먼드가 스완슨을 모방하는 것인지 흐릿해진다. 영화 속의 노마 데스먼드는 사라진 무성영화 시대의 상징적인 존재다. 그런데 그녀의 역할을 비슷한 경력을 가진 무성 시대의 스타 글로리아 스완슨이 연기하니,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혼동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지, 아니면 그 반대로 자연이 예술을 모방하는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실제 인물들이 카메오로 등장하여 이런 경계의 흐릿함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데스먼드와 카드놀이하는 배우들은 전부 무성 시대 스타들이고, 이들 가운데는 버스터 키튼도 끼어 있다. 세실 B. 드밀은 파라마운트의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감독으로 나온다. 발렌티노 등 많은 실제 이름들이 들리는 것도 이런 효과를 더욱 가중시킨다.

영화는 더이상 자연에서만이 아니라 영화 자체에서도 창작의 동기를 찾았다. 그만큼 영화도 이제 어엿한 역사를 갖고 있음을 말한다. 이젠 자연/현실은 제쳐두고 오로지 영화에 대한 관찰로 영화를 만드는 영화인들도 나온다. 60년대 프랑스의 누벨바그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영화가 영화를 이야기하는 색다른 태도가 마련된 것이다.

다음엔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Les quatre cents coups, 1959)를 통해 60년대 누벨바그의 리얼리즘을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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