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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가 만난 사람] 배우 하정우
김혜리 사진 이혜정 2008-10-31

실패조차 흥미진진할 야심가

<용서받지 못한 자> <비스티 보이즈> <멋진 하루>에서 그가 연기한 적응 잘하고 유들유들한 남자의 초상은 배우 하정우의 특색이기도 하다. 영화 안에 들어간 그는 무색무취하고 탄력있다. 그의 얼굴은 그림처럼 아름답지는 않으나 긴 눈꼬리와 붉은 입술은 스크린에 표정을 뚜렷이 새기고 유연한 장신은 자세의 작은 변화로 풍부한 표현을 구사한다. 관객은 멈추어 그의 자태를 감상하지 않을지언정 하정우가 움직이면 눈으로 좇는다. 그래서 하정우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클로즈업이 아니라 관객이 그를 주시할 수 있는 넉넉한 시간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태정부터 <멋진 하루>의 병운까지 하정우의 인물은 시간만 주면, 영화가 애써 감싸주지 않아도 관객에게 자신을 해명해냈다. 한편 편집으로 삭제된 분량이 많고 스크린에 노출된 시간이 짧았던 <구미호가족>과 <잠복근무>에서 하정우가 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정우가 제법 오래 달고 다녔던 “혜성 같은 신예”라는 평판은 혜성이 우리 시야에 들어오기까지 장구한 여행을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만 적절하다. 하정우의 스토리는 자못 동화적인 데가 있다. 소년은 타고난 재능을 일찍부터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즐겼고, 연기자 아버지와 무용을 전공한 어머니, 운동선수와 모델 친척이 신기할 것 없는 성장 환경은 그의 꿈에 다분히 우호적이었다. 외국어부터 피아노까지 유감없이 누린 취미도 훗날 톡톡히 연기에 소용이 됐으니 그야말로 미래의 전기 작가를 의식한 것 같은(?) 인생이다.

마침내 제대로 연기를 공부하게 됐을 때의 신명을 추억하는 하정우의 말투에는 안도감마저 비쳐난다. 배우 하정우는 누군가 읽어주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던 책이다. <두번째 사랑>을 제작한 이준동 대표는 부산영화제에서 <용서받지 못한 자>를 함께 관람한 영화인들이 하정우가 언제 터져도 반드시 터질 배우라는 데에 이견이 없었던 일을 기억한다. 그러나 하정우를 흥분을 자아내는 배우로 만든 것은 빠른 샛길에 무심해 보이는 행보였다. <시간> <구미호가족> <숨> <두번째 사랑> <추격자> <비스티 보이즈> <멋진 하루>로 이어지는 하정우의 출연작 목록은 저예산 예술영화나 흔쾌히 투자를 받기 어려운 영화를 환대했다. <프라하의 연인>으로 지명도를 높인 직후 드라마 제의를 물리치고 <시간>에 뛰어들었고 <히트>의 ‘완소 훈남 김 검사’가 사랑받은 다음에는 부랴부랴 <추격자>의 연쇄살인자로 안면을 바꾸었다. 일견 고지식해 보이는 이 이력은 어쩌면 배우로서 이기적인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도전적 배역을 욕심낼 수는 있지만 욕심에 값하는 성취까지 보여주긴 쉽지 않은데 하정우는 난해한 역에 연달아 도전해 모두 일정한 완성도를 냈다.” 이준동 대표의 평이다. 급기야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가 거둔 입지전적 성공은 한국영화의 문제작과 함께 부상해 자리를 굳힌 선배 한석규, 송강호의 전례마저 연상하게 만들었다.

하정우는 엘리트 배우다. 명문대 졸업장이 있어서 엘리트 배우가 아니라 배우로서 엘리트적 성장 과정을 거쳤기에 엘리트 배우다. 하정우는 야심가다. 어떤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탁월한 배우가 되는 일이 점지된 소명임을 의심치 않는다는 의미에서 야심가다. 심지어 하정우는 자신의 작업이 호평받는지 무시당하는지 살피는 데에 그치지 않고 올바른 이유로 주목받는지 연연한다. 나름대로 신중히 작품에 임해왔는데 단지 흥행이 잘됐다는 이유로 <추격자>가 자기를 보는 시선을 바꿔놓았다는 점에 못내 마음을 쓴다. 좋은 예술가는 찬사까지 이겨내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는 걸까. 확실히 이 면밀하고 신중한 배우는 예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실패가 온다면 그것은 뜻밖의 방향으로부터 찾아올 것이며 우리에겐 그 실패조차 흥미진진할 것이다.

-시인이 출판하기 전부터 시인이듯이, 데뷔를 해야만 배우의 의식을 갖는 건 아니잖아요. 한 뮤지션은 고교 밴드를 할 때부터 “난 뮤지션이니까 신비감이 있어야 해”라고 생각하며 행동했다고 들었어요. 하정우씨는 언제부터 자기를 배우라고 여겼나요? =세살 때인가, 다쳐서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었어요. 눈물을 한 차례 그쳤다가 다시 울기 시작했는데 첫 번째 울음은 진짜 눈물이었지만 두 번째 눈물은 첫 울음이 남긴 감정을 갖고 연기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아요. 그 다음부터 어떤 경험을 할 때면 언젠가 표현하게 될 거라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배우로서’ 기억해두었던 것 같아요.

-보통의 가정에서 배우가 되겠다고 하면 예외적인 소망이지만, 아버지가 배우였고 성인 연기자들을 흔히 대하니 자연스럽게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하나로 보이기도 했겠어요. =그러나 배우 2세니까 당연히 연극영화과에 간다는 시선은 싫었어요. 그래서 대학 전공은 다른 학문을 해서 우회로를 택하면 어떨까 했죠. 그런데 어머니가 연극과를 강하게 권유하시며 손잡고 매니지먼트 사를 찾아가셨어요. 입시 연기학원도 등록했는데 그때 이범수 선배가 잘나가는 강사였죠. (웃음) 같은 기획사에 계시던 이경영, 권해효 선배님 등이 제가 뭘 하나 연기하면 감탄해주시곤 해서 으쓱했죠. 그러다 중앙대 연극과에 입학하고 나서 깨지기 시작했고요. (웃음)

-교수님보다는 동기생한테서 연기에 관해 더 많이 배우는 유형이 아닐까 짐작이 돼요. =각자의 메소드를 찾는 과정에서 서로 대화하고 교류하고 그러다 한계에 부딪히면 교수님이 와서 풀어주셨어요. 저희는 별났던 것이 칭찬도 아끼지 않았어요. 친구의 공연과 연습을 보면 화려한 수사로 “실로 멋진 런 스루(run-through, 연습)였다. 너의 새로운 면을 봐서 감동했다” 운운하는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고. (좌중 웃음) 대학 1학년 때 뉴욕에 3개월간 어학연수를 갔어요. 연수 생활이 너무 즐거웠고 학과 분위기가 강압적이다 보니 학교를 그만둘 생각을 했어요. 몇 개월 동안 공연 준비하면 심부름만 하면서 술만 먹고 배울 것도 없는 것 같고. 그래서 꼬드긴 두 친구 중 하나가 김강우였고요. 재미난 건 결국 몇년 뒤에 강우나 저나 학교에서 학생회 이끌며 중추 역할을 했다는 거죠. (웃음)

-원래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리더십도 강한 편이죠. =그렇게 1학년 때는 휴학할까 뉴욕필름아카데미로 유학갈까 고민했는데 그때 집안에 큰 사건이 터졌어요. IMF 무렵 어머니와 외가에서 하시던 사업이 무너진 거죠. 그 와중에도 유학 생각을 포기하지는 않았는데 한 선배가 이번에 자기가 연출하는 작품이 있는데 딱 한번만 제대로 해보고 결정하라고 권했어요. 펠리니의 <길>을 연극으로 각색한 작품이었는데 서커스 단원 중 하나로 분한 제 대사는 딱 한마디 “모포를 가져와”였어요. 무대에 서 있는데 사람들이 웃었어요. 쟤는 똑바로 서지도 못한다고요. 높았던 자존심에 흠집이 나기 시작했고 열심히 하기 시작했어요. 공연한 배우들과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가서 연출자에게 채택되기도 하고 연기의 엄청난 어려움과 재미를 동시에 느끼면서 구체적인 욕심이 마구 생긴 거죠. 그해 말 중앙대에서 50명이 MBC 탤런트 공채 시험을 봤는데 최종까지 올라간 두명 중에 들었어요. 그리고는 떨어졌죠. 아버지에게 바로 군대를 가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이튿날 곧바로 병무청에 연락을 하셨어요. 멀리 내다볼 때 군복무를 일찍 마치고 중단없이 연기를 하는 것이, 한창 자리를 잡기 시작할 몇년 뒤에 일의 흐름을 끊는 것보다 좋겠다고 판단했어요.

-남자들끼리 모여 있는 자리에서 하정우씨는 주로 어떤 역할을 담당하나요? =많이 떠들어요. 어렸을 때부터 절친한 친구 일고여덟명이 있는데 예전에는 그 모임도 제가 자주 주최를 했죠.

-중앙대 연극과 과회장도 지냈죠? 과에서도 아웃사이더라기보다는 주류의 지도자였나 봅니다. 과 후배인 배우 정경호씨 인터뷰를 보고 놀란 적이 있는데요. 하정우 선배가 “너희 학번에서도 연예인이 나와야 할 텐데, 잘생긴 네가 가망이 있겠다”고 가둬놓고(?) 훈련시켰다는 일화였어요. 돌아보면 그때 하정우씨도 막 시작하는 입장이었을 텐데 지도자 역할을 한 거잖아요. =저희 과가 워낙 그래요. 스물네다섯살 된 선배 형들이 수염 기르고 막걸리 마시면서 연기론 들려주시고. (웃음) 경호는 워낙 매력있고 외모와 달리 고전적인 친구죠. 멋진 촌스러움이 있는 진짜 남자고요. 연극과 회장은 거의 두목이에요. 120명쯤 되는 학생들의 수업, 행사 불참 이유도 모두 보고받고. 웃긴 점이 MT에 빠지려면 의사 소견서, 부모님 동의서 등 서류 다섯 가지를 학생회에 제출해야 해요. (좌중 폭소)

-<마들렌>을 시작으로 한동안 오디션을 많이 본 걸로 압니다. 오디션의 가장 고통스러운 점은 무엇인가요? =<마들렌>에서 신민아씨 남자친구 역으로 합격해 출발은 산뜻했는데 그 다음부터 연방 떨어졌죠. 영화사 찾아가 기다리다가 캠코더 앞에서 자기소개하고 연출부원의 디렉션에 따라 연기하고 집에 가서 전화를 기다리고, 그 과정 전체가 스트레스죠. 탈락자에겐 전화를 해주지 않으니 혼자서 패인을 짐작하고요.

롤모델은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

-아까 메소드를 언급하셨는데 좁은 의미의 전통적 메소드 연기가 아니라 각자 맞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겠죠. 어느 순간 하정우의 방식을 찾았나요, 진행 중인가요? =방식을 찾으면 큰일나는 거죠. 계속 새로운 것이 나와야 하고 작품마다 메소드는 달라져야 해요.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내가 몇 가지나 갖고 있는지 내 말소리의 음질이 어떻게 변화하고 내 뒷모습이 걸을 때 리듬을 어떻게 타는지, 손짓과 작은 움직임들이 어떤 감정신에 대입되는지 끝없이 발견해가야죠.

-내가 가진 것이 뭔지를 파악하는 일도 생각보다 오래 걸리죠? =그래서 계속 정리해요. 기존 영화의 캐릭터에서 모델도 찾고 나름 오마주도 하고요. 본보기로 삼는 배우가 몇 있어요.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니콜라스 케이지, 조니 뎁, 그리고 빈센트 갈로. 요즘에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를 다시 들여다보고 있어요. 드 니로는 영리해요. 분명 이미지에 핸디캡이 있고 식상할 수 있는데 이도 뽑고 체중도 조절하고 이것저것 시도하죠. 알 파치노처럼 이미지와 연기 패턴을 잡아 밀어붙이는 저력도 존경스럽지만 드 니로의 방식도 좋아서, 이것저것 다 갖고 싶어요.

-자신이 남보다 분석적으로 일하는 배우라고 느낍니까? =아마도요. 예를 들어 우는 연기라면, 어떻게 울어요? 전 울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단 우는 것처럼 어떻게 하면 리얼하게 보이는가를 연구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배우가 계속 우울하게 있어야 눈물 연기가 된다면 힘들어져요. 우는 신이나 웃는 식이나 먹는 신이나 최대한 철저하게 관객한테 친절히 다가설 수 있게끔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과거의 개인적 경험을 끄집어내서 감정을 끌어올리는 방식은 아니네요. =스타니슬라프스키식 연기는 연극 <카르멘>에서 돈 호세 역을 할 때 100% 실패했어요. 돌아보면 너무도 이기적인 연기였죠. 혼자 감정을 억지로 만들어내다보면 계속 닫혀요. 그리고는 <오델로>라는 작품에서 그 방식을 배제했더니 관객에게 전달이 더 잘됐어요. 그런데 카메라 연기로 넘어오면서 고민이 컸죠. 영화 연기는 내가 주체로 연기하는 게 아니라 사이즈에 따라 달라져요. 감정을 얼마나 넣느냐는 감독 몫이죠. 영화의 메커니즘을 알아가면서 연기가 점점 단순화돼요. 제가 지금 그 시기예요.

-새 인물을 받아들면 그의 숨은 사연을 풍부하게 상상하는 편이죠? 어디부터 착수합니까? 유년기의 트라우마 같은 무거운 것부터인가요? 버스 타면 앞자리에만 앉는 습관처럼 사소한 부분부터인가요? =외형부터 상상을 해서 비슷한 주변 인물과 영화 캐릭터들을 따와요. 그림이건 인물 사진이건 이미지를 수집하죠. 그리고 그 이미지의 안을 지금까지 관찰한 인간들의 모습과 감독님의 이야기로 채워요. 사소한 것까지 메모를 하기 때문에 인물마다 스크랩이 생기죠. 불현듯 떠오르는 이미지도 있어요. <멋진 하루>의 병운은 <키드>의 찰리 채플린 뒷모습을 생각했어요. 채플린이 꼬맹이에게 유리창에 돌 던지라고 사주하는데 꼭 그 꼬마가 희수(전도연) 같았어요.

-새로운 영화의 촬영 시작 전날은 보통 어떻게 지냅니까? =크랭크인 직전 2, 3주는 매우 예민하고 별별 생각이 다 들어요.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고 1, 2주 남겨두고는 하기 싫다는 감정이 극에 달해 도망치고 싶어져요. 친구들 말로는 촬영 임박할 때 술자리에서 제가 가끔씩 멍해진대요. 그러다가 5회차 촬영이 지나면 안정이 돼요.

-하정우씨는 몸이 믿음직한 배우입니다. 다시 말해 민첩하고 유연해 보입니다. 철인3종을 훈련한 적도 있고 등록한 회원들의 달리기 누적 거리를 순위 매기는 모 스포츠용품 사이트에서 국내 러닝 소요시간 2위에 오른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러 활동 가운데 스포츠가 주는 쾌감이 뭔가요? =군대에 있는 동안 실연을 겪었어요. 당시 행정병으로 있어서 주말에 휴가를 자주 나올 수 있는 조건이었는데,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한동안 부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무작정 달리기를 했는데 그러면서 내가 맑아지는 걸 느꼈어요. 지금도 하루 두번은 운동을 해요.

-아버지나 어머니가 배우인 연기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여유가 있는 것 같아요. 일의 세계와 사생활의 세계 사이에 골이 깊지 않다고나 할까. 집으로 돌아가도 배우가 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정상적’으로 균형 잡아주는 면이 있나봐요. =동의해요. 밤샘 촬영하고 낮에 자다가 아버지 전화를 받아도 피곤한 티를 못 내요. 10년 전 집에 닥친 경제적 어려움을 복구하는 데 6년이 걸렸는데 그동안 아버지는 드라마를 20편 했어요. 5편 겹치기 출연을 하면서도 집에서도 밖에서도 내색하지 않으셨어요. 저희 형제도 잘 이겨낸다는 걸 아버지에게 보여드리고 싶었고요. 그런 모습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닌 걸 알아요. 놀라운 건 그 일을 겪는 와중에도 “이 경험이 나중에 배우로서 무기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웃음) 그때 제가 살길은 배우로서 변화구 아닌 직구 승부뿐이라고 믿었어요. 직구 하나 멋지게 던져서 이걸 아무도 못 치게끔 하겠다는.

<괴물>의 그 장면만 틀어서 가끔 봐요

-하정우씨의 연기 스타일을 형용사로 묘사한다면 명쾌한 연기, 정확한 연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겸손한 화법을 쓰지만 은근히 자신의 연기에 대한 긍지도 높아 보입니다. =연기를 너무 좋아하니까요. 영화를 보다가도 명연기를 보면 열광해요. <괴물>에서 송강호 선배가 병원에 붙들려 머리에 주삿바늘이 꽂히려는 부감숏이 있잖아요. 애원하다가 매점 운영권 주겠다고 구슬리다가 화내는 신요. <괴물>에서 그 장면만 틀어서 가끔 봐요. 대사도 뭉그러져 들리지도 않는데 진짜 현실같이 와닿잖아요? 아아, 진짜!

-그렇다면 나쁜 연기에도 민감하겠죠? =엄청나게. (웃음) 그러나 언뜻 나빠 보이는 연기에도 뭔가 미학이 있지 않을까 유심히 보죠.

-<히트>에서 공연한 고현정씨는 하정우씨가 많은 일을 겪은 사람처럼 보이고, 연기에 대해 “이것은 이거고 저것은 저거다”라고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은 배우 같다고 말하더군요. =학교 다닐 때 칭찬 한마디 받기가 어려웠어요. 구부정하게 서 있는 자세를 비롯해 핸디캡도 많았고요. A형에 물고기자리라서인지 완벽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별의별 연구를 많이 했어요. 주변 사람들의 인물형을 정리한 파일도 만들었죠. 엉뚱한 계기가 있었어요. 여자친구에게 실연을 당하고 나서 여자의 마음을 알고 싶어 <여심공략법>이란 책을 읽었는데 그걸 시작으로 고속도로에서 3천원에 파는 책들, <별자리론> <혈액형으로 나눠보는 인간> 부류를 독파했죠. (좌중 웃음) 애니어그램에 관한 책도 흥미로웠어요. 그것이 캐릭터 분석으로 넘어갔고 손금, 관상 보는 책까지 봤어요. 한편 좋아하는 배우의 필모그래피도 연구를 해요. 조니 뎁이 왜 <스피드>를 거절했을까. 제 생각엔 그 작품을 하면 막연히 자기가 발각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 같아요. 막연한 추측이죠.

-그렇다면 동경하는 배우들의 배울 점뿐 아니라 약점도 유심히 보겠군요. 어떻게 결점을 덮거나 극복했는지. =로버트 드 니로는 거의 유일하게 멜로를 찍은 것이 <폴링 인 러브>예요. 왜일까 생각해봤어요. <히트>를 보면 서브 텍스트로 로맨스가 약간 나오는데 그 정도가 자신에겐 딱 적당하다고 봤을 거예요. <히트>를 보면 드 니로와 파치노 대결에서 드 니로가 압승했다고 생각해요. 파치노가 과잉했던 까닭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제작을 했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배우들의 궤적을 보면서 영화를 선택할 때 많이 참고해요.

-최근에 만난 한 감독님이 노련한 배우가 신인과 다른 점은, 자신이 지금 연기하는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어느 지점에 해당하는지 머릿속에 그래프를 그리면서 톤을 조정하는 점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추격자>는 약 30시간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이고 <멋진 하루>는 그야말로 한나절을 밀도있게 이어가는 이야기인데 특기할 만한 어려움은 없었나요? =그보다 땀과 피의 분장을 연결하는 일이 어려웠죠. <추격자>는 촬영 전에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시나리오를 펼쳐놓고 감독님과 지영민의 장면의 분배를 속속들이 이야기했어요. 감독님이 명확한 계획을 갖고 계셨고 촬영장에서도 워낙 합이 잘 맞아 어려움이 없었어요. <멋진 하루>도 집중력을 갖고 가능한 한 극중 순서대로 찍은데다가 제가 거의 매일 촬영장에 갔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어요. 큰 설계는 있었죠. 병운과 희수가 돈을 빌리러 가는 상대에 따라 연기가 달라지죠. <추격자>는 하룻동안 지영민의 컨디션이 어떻게 변할지만 생각했어요. 밤을 새우면 피곤하고 예민해질 테고 그러다가 일순 정신이 맑아질 때가 올 것이고. 맑아지는 대목이 바로 개미슈퍼 장면이죠.

-<용서받지 못한 자> <추격자> <멋진 하루> 등 출연작을 보면 대사와 액션의 타이밍을 갖고 상대 인물을 쥐락펴락하는 예가 많아요. 그래서 코미디를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하게 되고요. =웃긴 이야기하길 즐겨요. 코미디를 아주 좋아해서 연극할 때도 반 이상은 희극을 공연했고 완전히 코미디로 바꾼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포조 역을 맡았죠.

-가장 부담스러운 사이즈의 숏은 무엇입니까? =바스트숏보다 위쪽으로 가는 숏은 싫어요. 줌인과 트랙인처럼 다가오는 숏도 아직 익숙지 않아요. 우연히도 지금까지 한 영화들의 카메라는 어느 정도 뒤로 물러서 있는 스타일이었어요. TV드라마의 사이즈는 좀 과잉하다고 느껴요. 관객이 봐도 감정이 과해서 힘들지 않을까요. 미디엄숏, 허리나 무릎까지 잡는 숏, 두 사람이 프레임 안에 들어 있을 때가 편해요.

-공교롭게도 출연작을 훑어보면 하정우씨가 분한 인물은 영화 시작부터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더군요. =<추격자>의 프롤로그 있잖아요? 너무 멀리서 잡아서 잘 안 보였나요? 제가 한 배역은 주로 투톱 중 포지션이 약간 뒤로 빠져 있는 스트라이커예요. 그런데 주연이면서도 조금 처져 있는 그 자리가 이상하게 좋아요. 작품과 인물을 택할 때 제일 많이 보는 요소가 그 역할이 지닌 잠재력이에요. 충분한 여백과 공간이 있어서 그리로 들어가 내 식대로 채울 수 있는 쪽을 선호해요. 그래야 내가 뭔가 일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서 영화 공기를 바꾸는 캐릭터라는 뜻이기도 하겠죠. 가끔은 쉬어가는 작품이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해요? =육체가 힘든 건 힘든 게 아니에요. 예산이 적어 3천원짜리 밥을 먹어야 하면 먹고 앉을 의자가 마련돼 있지 않으면 제가 들고 가서 펼쳐놓으면 되죠. 정말 힘든 경우는 내 자리가 아닌데 억지로 뭔가 하고 있다고 느낄 때예요. 가진 것도 없는데 있는 척해야 하는 상황은 그래서 애초에 선택도 안 해요. 감독님과 대화를 하다 난데없이 채널이 닫히고 콘티대로 가자고 할 때나 대학생한테 차려, 열중쉬어 가르치듯 이야기할 때 현장에서 외로워지죠.

-하정우씨의 경우는 타입 캐스팅이 원천적으로 어려운 조건이 아닌가 싶어요. 역으로 말하면 딱 보이는 외모만으로 정형을 대변하기 힘들다는 거죠. 즉 넉넉한 스크린 타임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만큼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는 배우이기도 하고요. =신인 시절에 그래서 오디션에서 고전했던 것 같아요. 나이에 비해 조숙해 보이는데 꽃미남은 아니고, 잘생기진 않았는데 그렇다고 평범하지도 않고. 연기는 곧잘 하는데 아리송한 분위기라서 제일 많이 듣는 소리가 “가능성은 있는 것 같은데…”였어요. (웃음) <마들렌>을 찍었던 스물다섯살 때 제작자 서우식 대표가 “너는 서른살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추격자>의 지영민을 택했을 때도 어떻게 네가 연쇄살인범 역을 하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비스티 보이즈>와 <용서받지 못한 자>를 함께한 윤종빈 감독과는 앞으로도 계속 같이 하고 싶다고 했죠? 두분이 꿈꾸는 영화에 교집합이 있나요. =마틴 스코시즈가 그 교집합이에요. 그는 갱스터도 찍었지만 <코미디의 왕>이나 <뉴욕 뉴욕> 같은 영화도 찍었거든요. 스코시즈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의 연기도 무척 좋아해요. <좋은 친구들> 오프닝 장면을 보면 드 니로가 트렁크에 총을 쏘고 발길질하는 모습을 로앵글로 보여줘요. 그런데 그 액션이 각 잡힌 멋진 액션이 아니라 허술하고 우스꽝스러워요. 그런 빈 곳이 인물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해요. 저도 영화가 허용하는 한 제가 지닌 우스운 면을 영화에서 솔직히 드러내고 싶어요.

하루 만번씩 읽으면 감정 실리게 마련

-<두번째 사랑>을 찍고 나서 개인적으로 리액션의 재발견이었다고 평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제작자인 나우필름 이준동 대표가 베라 파미가의 연기를 치하했더니 “난 하정우의 연기에 리액션했을 뿐이다”라고 했답니다. =멋진 칭찬인데요. 제가 주눅들까봐 베라가 과하게 칭찬해주곤 했어요. 리액션을 재발견했다고 말한 건, 1차적 언어 소통이 막혀 있는 상태에서 반응했기 때문이에요.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썼기 때문에 상대 배우가 대화를 변형시켜 애드리브를 던지면 어떻게 대응할지까지 대비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몇번 해보니 어떤 변주가 돌아올지 대략 알겠더라고요. 그런 점은 좀 예민해요. 배우끼리 교감은 한국과 다를 게 없었어요. 눈이 멀면 다른 감각이 예민해지듯, 상대의 신호를 캐치하려고 다른 감이 막 발달하는 거예요.

-외국어를 말해야 할 경우 평소보다 어조가 높아진다거나 성격이 약간 달라진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잖아요. 연기의 도구로서 다른 언어를 쓴다는 건 어떻던가요? =부담 갖지 않으려고 했어요. 셰익스피어 연극을 할 때도 대사가 무슨 뜻인지 몰랐거든요. (웃음) 연극 대사 외우듯 영어를 받아들였어요. 셰익스피어 극에서 어려운 말에 감정을 싣는 훈련을 경험했기에 영어에 감정 싣는 게 무리는 아니었어요. 연극 대사를 익힐 때는 자다가 깨워 “일곱째 줄부터 해!” 하면 할 수 있을 정도까지 외우거든요. 대사를 뒤죽박죽해도 그 말만 갖고 울 수 있을 만큼요. 하루에 만 번씩 읽으면 그러지 말라고 해도 감정이 실려요. 그러면서 연기의 세부를 잡아나가고 현장에 가서 상대 배우의 액션에 반응하는 거죠.

-무엇보다 <두번째 사랑>은 하정우라는 배우의 육체성이 강렬히 드러난 영화입니다. 일용노동자인 지하(하정우)는 티셔츠를 땀으로 적시며 살아가는 인물이었고 베드신도 워낙 많았죠. 다른 출연작을 봐도 주먹다짐 장면이 잦아요. 베드신이나 싸움장면처럼 대사없이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를 어떻게 계획하는 지 궁금합니다. =카페에 편히 앉거나 가만히 서서 대화하는 영화가 별로 없었죠. (웃음) <두번째 사랑>의 베드신의 흐름을 보면 지하가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 적극성을 띠는 전환점이 있어요. 일단 섹스신마다 한 단어를 큰 주제로 잡았어요. 예컨대 처음 대리부가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은 직후 섹스는 뻘쭘함이 컨셉이고, 두 번째 섹스에서는 왜 그녀가 이런 제안을 했을까에 대한 궁금함이 주된 감정이죠. 그 다음은 동작의 템포, 그리고 체위였어요. 제 연기 계획보다 김진아 감독이 짠 콘티를 포함해 논해야 하는 부분이죠. 첫 섹스가 CCTV에 찍힌 베드신 같은 느낌이라면 두 번째는 카메라가 두 남녀 사이로 좀더 들어가고 다음은 점점 눈에 가까이, 숨소리에 가까이 다가서요.

-영화에서처럼 잠든 여자에게 사랑해라고 말한 적 있어요? =잠든 여자친구 옆에서 술을 마시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말한 적이 있어요. 그녀가 깨서 “너 지금 뭐하는 거니?” 묻더군요. (웃음)

-촬영을 마친 한·일 합작영화 <보트>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각색한 와타나베 아야가 썼더라고요? =원작을 썼죠. 와타나베 아야의 집이 니가타현인데 해류 때문에 바닷가에 흘러오는 한국의 쓰레기를 보고 떠올린 이야기래요. 저는 밀수를 하는 형구라는 인물이고요. 쓰마부키 사토시가 한국어로 대사를 하면서 출연해요. 일본영화는 친절하게 드라마가 흘러가는 것이 특징인데 <내 청춘에 고함>을 찍었던 김영남 감독의 연출과 만나니까 카메라가 한 발짝 떨어져서 이야기를 담아내더라고요. 결과가 궁금해요. <국가대표> 다음 작품인 <패럴렐 라이프>는 조연으로 5회차 정도 촬영할 것이고 다음은 <삼거리극장>을 찍었던 전계수 감독님과 <러브 픽션>이라는 엽기적 로맨틱코미디를 할 거예요.

-지금 촬영 중인 <국가대표>를 통해 하정우씨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영화를 하면서 건강해질 것 같았어요. 학교 다닐 때 본 김용화 감독님의 단편 <자반고등어>를 기억하는데 전작 <미녀는 괴로워>와 <오! 브라더스>도 재미있게 보고 감각적인 연출자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주연한 출연작은 거의 청소년 관람불가였고 <멋진 하루> <슈퍼스타 감사용> <마들렌> 정도가 15세 관람가인데 <국가대표>는 지방 관객도 많이 보고 나를 영화배우로 볼 수 있는 작품이 됐으면 해요. 연기를 굳이 말하자면 <히트>의 김 검사 느낌에 가까울 듯하고 <핸콕>의 윌 스미스, <제리 맥과이어>의 톰 크루즈 생각을 하고 있어요.

10년 적립식 펀드에 돈을 더 넣은 이유

-어려서부터 수영, 피아노, 스키, 외국어, 그림 등 많은 기능을 배웠다고 알아요. 일찍 결심한 만큼 연기에 도움되리라는 생각도 했을 테고요. 어찌 보면 경영자의 마인드로 배우 인생을 영위하고 있다는 인상이네요. =많은 걸 갖고 싶었나봐요. 하지만 어려서는 뛰어놀고 운동만 했어요. 피아노는 2002년부터, 발레는 2003년부터 배웠죠. 돌이켜보면 배우로서 준비과정이 탄탄했던 것 같지만, 당시에는 그때 하고 싶은 일을 즉각 했을 뿐이에요. 시행착오나 상처도 다 연기의 자양분이 된다는 걸 배웠기 때문에 열어놓고 살고 싶어요. 사람도 진실하고 솔직하게 대해서 아니면 그때 안 만나면 되죠. 다 맛을 보고 싶어요. 저도 게으를 때가 있어요. 영화가 요구하는 만큼 근육을 못 만들기도 했고요. 언젠가는 한번 멋지게 살이 쪄서 목이 두껍고 숨차서 씩씩거리는 조폭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마이클 매드슨처럼.

-단편영화 연출도 해보셨죠? =네 친구가 어느 날 술을 마시다가 사람을 때렸는데 죽어버린 거예요. 네명이 다 도망을 쳐서 수사망이 좁혀지는데 네 사람의 숨겨진 면모가 그때부터 드러나요. 2004년에 만든 40분짜리 중편인데 후반작업을 못했어요.

-독립영화를 제작할 요량으로 10년짜리 적립식 펀드도 들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최근 금융 위기에도 유지하고 있나요? =도리어 돈을 더 넣고 있어요. (웃음) 장기적으로 보니까요. 기본적으로 되도록 다작을 해서 친숙하게 느껴지고 싶어요. 드라마도 할 생각이고 기왕이면 트렌디한 작품보다 시대극 시리즈 같은 국민드라마를 해서 아예 안방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조용히 열심히 일하다가 40대 초반쯤 영향력을 가지면 좋겠어요. 제가 좌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구심점이 되어 한국영화의 한축을 이루고 싶어요. 김기덕, 홍상수, 이윤기 감독님이 저예산으로 꾸준히 작품을 만들 듯 투자를 못 받더라도 내 돈으로 영화를 만들어 보여주고도 싶어요. 제가 알 파치노 컬렉션을 하듯 내 영화를 꾸준히 보고 DVD를 소장하는 팬들이 생기면 그게 전부라고 생각해요.

-하정우씨 커리어의 특징이 있다면 한국의 중요한 배우로 부상함과 동시에 아시아의 유망주로 거의 동시에 떠올랐다는 점인데요. =마케팅의 힘이 아닐까요. 올해 칸에 갔을 때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과 인사를 했는데 출품을 받아 검토한 한국영화가 <비스티 보이즈> <추격자> <멋진 하루>였고, 지난해에는 <숨> <두번째 사랑>이어서 한국영화는 너만 나오냐고 웃긴 하더라고요.

-일흔살까지 배우 인생을 길게 본다고 했는데 지금까지는 어떤 단계였다고 규정하나요? =막 출발했다고 생각해요. 굳은살이 박이고 요령이 생기면 재미없어질 것 같아요.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저를 어렵게 여기는 게 느껴져서 불편해요. 나이가 들수록 매니지먼트로 벽을 치기보다 좀더 편하게 영화현장에서 저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려고 해요. 이번에 3년 계약을 다시 했는데 그 다음 시기에는 에이전시 형태의 계약을 해서 더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일하고 싶어요. 지금도 되도록 촬영현장에서 매니저를 곁에 두지 않고 움직이려고 하고요.

-아까 보니 SUV 차량을 직접 운전하시던데요. =밴과 제 차를 없애고 회사 명의의 차를 운전해서 다니고 있어요. 저, 따라쟁이예요. (웃음) <매치스틱 맨>의 메이킹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니콜라스 케이지는 항상 촬영현장에 손수 운전을 하고 혼자 다닌대요. 첫 영화를 찍던 날 아침 현장으로 향하던 긴장된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아서래요. 집도 전세는 낭비라고 생각해서 월세 살고 1년만 계약해요. 목돈도 없지만 등록상의 내 소유가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얼마 전에도 집이 지루해져서 이사 계획을 세우다가 서재와 침실 가구를 바꿔치기했더니 집이 다시 재미있어져서 눌러앉았어요.

-아니 혼자서 가구들을 다 옮겼나요? =후배들에게 전화했죠. “얘들아, 오늘 형네 집에서 페스티벌이 있을 거야. 짐 옮기기 게임이 있어.” (좌중 웃음) 저는 집의 벽에 낙서도 많이 하고 문에는 그림을 많이 그려놨어요. 문짝을 아예 뗀 방도 있어요. 네? 집주인한테 말은 안 했는데요. 어, 그럼 안 되나요?

-사생활에 대해서도 장기적인 계획이 당연히 있을 것 같아요. =언젠가 일을 멈추고 1년 정도 공부하며 쉬고 싶어요. 그 휴식이 결혼과 동시라도 좋겠죠. 어차피 유목민 같은 인생이 될 듯한데 1년 백수가 되어 아내와 밀도있게 시간을 보내고 같이 학원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해먹으면 즐겁지 않을까요.

-1970년대 말 로버트 드 니로를 인터뷰한 기자가 당신이 이렇게 성공하고 주목받을 줄 예상했느냐고 물었어요. 드 니로의 대답이 절묘했어요. “성공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또,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렇게 될 것만 같기도 했다.” 혹시 하정우씨도 같은 경우 아닌가요? =자신감은 있었던 거 같아요. 아니, 그 믿음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들었겠죠. 완벽한 미래를 상상하며 현실을 잊으려 했고 시련이 오면 큰 사람이 되는 길에 거치는 과정이라고 여겼으니까요. <용서받지 못한 자>를 찍으면서도 윤종빈 감독과 농담으로 스코시즈와 드 니로가 <비열한 거리>로 성공했듯 이 영화가 우리의 <비열한 거리>가 될 거라고 말하곤 했죠. 사실 스코시즈-드 니로의 영화보다 그들의 행보가 부러웠던 거예요. <용서받지 못한 자>로 칸영화제에 초대받았을 때 둘이서 술 먹고 새벽에 뤼미에르극장 앞을 걸었던 기억이 나요.

-“좋은 배우는 좋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상에 오른 선배들을 만나면서 실감한 점이에요. 한 배우가 현장이나 사생활에서 만나는 인간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폭, 그리고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태도는 그가 극중 캐릭터를 해석하고 접근할 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追伸 클린트 이스트우드, 말론 브랜도,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워런 비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대니얼 데이 루이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인터뷰 도중 호명된 이들은 모두 하정우의 개인교사다. 윤종빈 감독은 하정우가 일하지 않을 때에도 언제나 집에서 무엇인가를 분주히 한다고 전했는데, 아마 그 시간의 대부분은 영화 속 교사들과의 수업이 아닐까. 배우는 많고 배울 건 많다고 믿는 하정우는 두번쯤 다짐했다. “지금 이렇게 연기에 대한 생각을 말하면서도 이 생각이 또 달라질 텐데 하는 걱정이 들어요. 어디까지나 저는 지금 2008년 10월18일 현재 서른한살까지 품어온 생각의 단면을 말씀드리고 있다는 점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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